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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호
《월간조선》 7월호에 게재된 <박시호의 행복편지-엄마는 늘 배가 불러>를 읽고 나니, 어머니 생각이 난다. 학생시절 어머니의 사랑이 없었으면 나는 80세 늙은 나이까지 살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日帝)로부터 광복한 후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살게 되면서 우리 집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됐다. 공산당은 우리 땅을 모조리 빼앗아 소작인들한테 주고, 우리 가족에게는 나쁜 땅만을 주면서 그나마도 우리 식구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빼앗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직접 농사일을 해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젊은이들과 같이 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60리(24km) 길을 통학해야 했다. 하숙은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 중에서 내가 제일 먼 곳에서 통학하는 학생이었다. 연탄이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어나 젖은 지푸라기로 불을 피워 밥을 지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하루도 식은 밥을 먹고 학교에 간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도시락만큼은 쌀밥을 담아주었다. 겨울에 학교에서 늦게 오면 항상 밥을 뜨거운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식지 않게 해놓곤 했다.
아침에 학교 갈 때에는 약 4km 정도 가야 해가 떴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웬만큼 아파도 결석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힘든 농사일에 시달려 피곤해도 군소리 하나없이 3일이 멀다 하고 해어지는 내 면양말(당시는 나일론 양말이 없었다)을 꿰매주곤 하셨다.
인민군 징집 피하려 넓적다리에 독초 붙여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2시간씩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런 것을 보며 어느 정도 전쟁을 예측했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부터 남포시 근방의 인민군들이 장비를 싣고 평양 쪽으로 가는 것이 목격됐다.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방송에서 “남반부 괴뢰군이 북반부 영토를 침범해 이를 격퇴시키기 위해 남진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전쟁 발발 3일 전부터 남포 시내 남녀 고등학생들에게 인민군 입대지원서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숨어 있었다. 점점 수색이 심해지면서 집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자 나는 텃밭인 콩밭에 호(壕)를 파고 숨어 지냈다. 어머니는 매일 같이 밭에 일하러 오는 척하며 밥을 날라다 주었다.
관할 내무서(지서)에서는 나를 찾아내기 위해 어머니를 잡아가서 사흘이 넘도록 풀어주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석방시키기 위해 부득이 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방된 어머니는 내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내 오른쪽 넓적다리에 큼직하게 ‘자라초’라는 독초를 붙여줬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처분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리에는 지금도 그때 자라초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유엔군의 공습이 심할 때라 밤중에 불도 켜지 못한 채 군용트럭에 실려 인민군 모병소가 있던 평양 숭실학교 강당으로 끌려갔다. 새벽에 도착해서 넓적다리에 감았던 붕대를 풀어 보니 큼직하게 살점이 패어 있었다. 징병 담당 군관에게 “종기 때문에 군대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군관은 “이 ××, 긴박한 때 상처가 뭐야”하면서도 나를 열외시켰다. 열외 대열에 대기하고 있는데, 다음 날 옆 동네 친구가 등에 독초 즙을 발라 상처를 내고 신체검사를 받다가 병역기피를 위해 일부러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나까지 독초를 붙여 상처를 만들었다는 것이 들통났다.
징병관들은 “종기를 일부러 만든 놈들은 총을 주면 거꾸로 쏠 놈들”이라며 광산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도 평북 운산금광으로 가게 됐다. 당시 광부들이 거의 인민군에 소집되어 광부가 부족할 때였다. 광산으로 끌려가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을 것이 뻔했다.
다음 날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 광산으로 출발하려 할 때, 평양 상공에 미군 B-29 폭격기가 나타났다. 공습경보가 발령되고, 모두 지하실로 대피했다.
그런데 학교 1년 후배가 “형님, 나는 집에 가게 됐어요”하며 불합격증명서를 내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내미는 증명서를 보니, 한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증명서에는 증명서 한 장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재빨리 후배의 증명서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하지만 일명(壹名)이라고 한문으로 쓴 것은 고칠 수가 없었다. 나는 공습경보가 해제되자마자 얼른 초소로 달려갔다. 증명서의 ‘일명’이라고 쓴 부분은 엄지손가락으로 가리고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만 보여주면서 “불합격 두 명이요”라고 말하고 빠져나왔다. 나는 집으로 가지는 못하고 집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누님집으로 갔다. 나는 유엔군이 남포에 들어올 때까지 산에서 숨어 지냈다.
어머니가 배낭에 넣어준 명주 두 필
유엔군이 진주한 후 부모님과 재회의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유엔군이 후퇴했다. 모두들 유엔군의 후퇴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는 “대동강을 건너가 일주일만 있다가 돌아오라”면서 내가 결혼할 때 쓰려고 간직했던 명주 두 필을 배낭에 넣어주셨다. 나는 피란을 내려오면서 그 명주 두 필을 쌀로 바꾸었다. 덕분에 15일 동안 구걸하지 않고 서울까지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1970년 미국으로 건너와 보람 있는 이민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 2002년 북한이 재미교포들을 상대로 성묘단을 모집하기에 북한을 방문했다. 부모님 묘소라도 찾아가서 불효(不孝)에 대해 용서를 빌려 했지만, 북한 당국이 “큰 장마로 성묘할 수 없다”며 성묘를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은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은 자식이 사는 플로리다 올랜도에 살면서 4년째 《월간조선》을 구독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앞으로도 좋은 기사를 많이 실어주기를 바라며 건투를 빈다.⊙
<이희호·재미교포 6·25 참전 국가유공자>
일제(日帝)로부터 광복한 후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살게 되면서 우리 집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됐다. 공산당은 우리 땅을 모조리 빼앗아 소작인들한테 주고, 우리 가족에게는 나쁜 땅만을 주면서 그나마도 우리 식구가 직접 농사를 짓지 않으면 빼앗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직접 농사일을 해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젊은이들과 같이 밭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는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60리(24km) 길을 통학해야 했다. 하숙은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 중에서 내가 제일 먼 곳에서 통학하는 학생이었다. 연탄이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어나 젖은 지푸라기로 불을 피워 밥을 지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하루도 식은 밥을 먹고 학교에 간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도시락만큼은 쌀밥을 담아주었다. 겨울에 학교에서 늦게 오면 항상 밥을 뜨거운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식지 않게 해놓곤 했다.
아침에 학교 갈 때에는 약 4km 정도 가야 해가 떴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웬만큼 아파도 결석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힘든 농사일에 시달려 피곤해도 군소리 하나없이 3일이 멀다 하고 해어지는 내 면양말(당시는 나일론 양말이 없었다)을 꿰매주곤 하셨다.
인민군 징집 피하려 넓적다리에 독초 붙여
당시 학교에서는 매일 2시간씩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런 것을 보며 어느 정도 전쟁을 예측했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부터 남포시 근방의 인민군들이 장비를 싣고 평양 쪽으로 가는 것이 목격됐다.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방송에서 “남반부 괴뢰군이 북반부 영토를 침범해 이를 격퇴시키기 위해 남진하고 있다”는 방송이 나왔다.
전쟁 발발 3일 전부터 남포 시내 남녀 고등학생들에게 인민군 입대지원서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집에 숨어 있었다. 점점 수색이 심해지면서 집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자 나는 텃밭인 콩밭에 호(壕)를 파고 숨어 지냈다. 어머니는 매일 같이 밭에 일하러 오는 척하며 밥을 날라다 주었다.
관할 내무서(지서)에서는 나를 찾아내기 위해 어머니를 잡아가서 사흘이 넘도록 풀어주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석방시키기 위해 부득이 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석방된 어머니는 내가 신체검사를 받으러 가기 전에 내 오른쪽 넓적다리에 큼직하게 ‘자라초’라는 독초를 붙여줬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처분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리에는 지금도 그때 자라초를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는 유엔군의 공습이 심할 때라 밤중에 불도 켜지 못한 채 군용트럭에 실려 인민군 모병소가 있던 평양 숭실학교 강당으로 끌려갔다. 새벽에 도착해서 넓적다리에 감았던 붕대를 풀어 보니 큼직하게 살점이 패어 있었다. 징병 담당 군관에게 “종기 때문에 군대에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군관은 “이 ××, 긴박한 때 상처가 뭐야”하면서도 나를 열외시켰다. 열외 대열에 대기하고 있는데, 다음 날 옆 동네 친구가 등에 독초 즙을 발라 상처를 내고 신체검사를 받다가 병역기피를 위해 일부러 상처를 냈다는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나까지 독초를 붙여 상처를 만들었다는 것이 들통났다.
징병관들은 “종기를 일부러 만든 놈들은 총을 주면 거꾸로 쏠 놈들”이라며 광산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도 평북 운산금광으로 가게 됐다. 당시 광부들이 거의 인민군에 소집되어 광부가 부족할 때였다. 광산으로 끌려가면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죽을 것이 뻔했다.
다음 날 일찍 아침식사를 하고 광산으로 출발하려 할 때, 평양 상공에 미군 B-29 폭격기가 나타났다. 공습경보가 발령되고, 모두 지하실로 대피했다.
그런데 학교 1년 후배가 “형님, 나는 집에 가게 됐어요”하며 불합격증명서를 내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내미는 증명서를 보니, 한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의 증명서에는 증명서 한 장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재빨리 후배의 증명서에 내 이름을 적어 넣었다. 하지만 일명(壹名)이라고 한문으로 쓴 것은 고칠 수가 없었다. 나는 공습경보가 해제되자마자 얼른 초소로 달려갔다. 증명서의 ‘일명’이라고 쓴 부분은 엄지손가락으로 가리고 이름이 적혀 있는 부분만 보여주면서 “불합격 두 명이요”라고 말하고 빠져나왔다. 나는 집으로 가지는 못하고 집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는 누님집으로 갔다. 나는 유엔군이 남포에 들어올 때까지 산에서 숨어 지냈다.
어머니가 배낭에 넣어준 명주 두 필
유엔군이 진주한 후 부모님과 재회의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유엔군이 후퇴했다. 모두들 유엔군의 후퇴는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는 “대동강을 건너가 일주일만 있다가 돌아오라”면서 내가 결혼할 때 쓰려고 간직했던 명주 두 필을 배낭에 넣어주셨다. 나는 피란을 내려오면서 그 명주 두 필을 쌀로 바꾸었다. 덕분에 15일 동안 구걸하지 않고 서울까지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1970년 미국으로 건너와 보람 있는 이민생활을 해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 2002년 북한이 재미교포들을 상대로 성묘단을 모집하기에 북한을 방문했다. 부모님 묘소라도 찾아가서 불효(不孝)에 대해 용서를 빌려 했지만, 북한 당국이 “큰 장마로 성묘할 수 없다”며 성묘를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은 얼마나 행복한지 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은 자식이 사는 플로리다 올랜도에 살면서 4년째 《월간조선》을 구독하고 있다. 《월간조선》이 앞으로도 좋은 기사를 많이 실어주기를 바라며 건투를 빈다.⊙
<이희호·재미교포 6·25 참전 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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