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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박시호 happyletter.park@gmail.com
⊙ 57세.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동국대 법무대학원 문화예술관련법
석사 과정.
⊙ 재무부장관 비서관,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http://sihopark.com.ne.kr twitter@parksiho
박한나 parkreative@gmail.com
⊙ 홍익대 국제디자인박사 디자인학 과정(휴학).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석사(Illustration 전공).
⊙ 전 제일기획 아트 디렉터.
⊙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작가 활동 중.
⊙ 57세.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동국대 법무대학원 문화예술관련법
석사 과정.
⊙ 재무부장관 비서관,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http://sihopark.com.ne.kr twitter@parksiho
박한나 parkreative@gmail.com
⊙ 홍익대 국제디자인박사 디자인학 과정(휴학).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석사(Illustration 전공).
⊙ 전 제일기획 아트 디렉터.
⊙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작가 활동 중.

얼마 전에 아들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이 오셔서 아들의 결혼을 축하해 주어서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축하 화환도 많았고 하객도 많았습니다. 결혼식에는 하객이 많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동안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축의금을 정리하다 보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의 축의금이 2만5000원이었습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습니다. 2만원이면 2만원이고 3만원이면 3만원이지 2만5000원, 이건 무슨 이유일까? 그리고 그 친구가 이 정도로 적은 축의금을 낼 리가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정리하는 과정에서 잘못했나? 하기야 가끔은 실수로 빈 봉투를 내는 경우도 있고, 봉투에 이름을 기재하지 않아 누구의 것인지 모를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었습니다. 축의금으로 2만5000원을 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어렵게 사는 친구가 아닌데… 그동안 만남이 다소 소원했지만 그래도 힘들게 산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렵게 그 친구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 축의금 얼마나 냈어?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서 그러는데 2만5000원 냈어?’”라며 어렵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피로연에서 그 친구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 어색한 상태로 전화를 끊었고 제 기분은 영 좋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일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그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에게 그 친구의 소식을 물었으나 아무도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다른 친구의 주선으로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뜻밖에도 지방에서 조그마한 통닭집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알려진 기업체의 임원으로 잘나가고 있었는데, 최근에 실직하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 결국 서울을 떠나 지방 도시에서 통닭집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대기업 임원의 돌연한 실직
부인은 통닭구이를 만들고 이 친구는 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처음 하는 일이라서 모든 것이 서툴고 힘이 들어 부인의 손은 기름에 데어서 상처가 나 있었고, 이 친구는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몸이 불편하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예전에는 이 친구가 모임에서 밥도 많이 사고 술도 많이 사서 아주 인기가 좋았고,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없더니 하는 일들이 힘들어지고 이런저런 사업을 새로 시작하여도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망해 가면서 가족관계도 나빠지게 되니,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여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며칠 동안 나는 왜 나만의 입장에서 그 친구를 바라보았을까요? 왜 축의금이 적다고 그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 친구에게 억지로 “야!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하자”며 소매를 잡아끌어 가까운 술집으로 가서 그동안의 경황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다녔던 잘나가던 회사에 어느 날 2세 경영인이 등장했고, 그후 아버지 세대에서 함께 일을 하던 임원들에게 떠나 달라고 하더랍니다. 난생 처음으로 당하는 실직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내가 왜 이렇게 돼야만 하지? 그동안 실직이라는 것이 남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나의 일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는 가족에게 말도 못하고 매일 아침 밖으로 나와 거리를 헤맸었답니다. 그렇게 갈 곳이 많더니 실직을 하고 나니 단 한 군데도 찾아갈 곳이 없더랍니다. 한강 다리를 수도 없이 걸으며 죽음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겠지. 그런데 남아 있는 가족은 어떡하지?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나 없이 어떻게 살까?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답니다. 아직 아이들이 공부할 기간도 많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데, 무슨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방법이 없었답니다.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내가 좋아 친했던 것이 아니라 내 직위 때문에 친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더랍니다. 세상인심이 이렇게 야속할까 하는 생각만 들더랍니다. 이런저런 사업을 해 보았지만 경험도 없고 남에게 친절한 모습으로 인사한다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힘들어서 제대로 할 수가 없더랍니다. 돈만 다 날리고 결국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와서 통닭집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는데 어렵긴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오토바이를 타 본 적도 없지, 남에게 고개 숙여 인사해 본 적도 없지, 남에게 먼저 다가간 적도 없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고개 숙이고, 배달이 늦었다고, 맛이 없다고, 비싸다고 이런저런 이유로 욕을 들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비로소 세상을 새로 배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왜 나는 50이 넘도록 세상을 모르고 살았을까, 왜 남에게 베풀지도 않고 나만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그동안의 삶을 많이 후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남에게 못된 짓 한 것을 지금 돌려받고 있다고 하면서 이제는 나름대로 삶의 방식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이젠 어떤 일이 닥쳐도 헤쳐 나갈 자신이 생겼다고 합니다. 왜 이런 자신감이 그동안 없었을까, 왜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알게 되었을까?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이 너무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결혼식 축의금 2만5000원은 두 식구가 하루 종일 번 돈이었다고….
온종일 통닭 팔아 번 돈은 얼마일까
나도 예전 같으면 많은 돈을 축의금으로 냈고, 2만5000원이라면 나도 욕을 했을 거라고….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허례허식 아무 소용 없고, 어느 날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는 인생에서 실속 있게 참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고…. 너무 적은 축의금이나, 미안하지만 나로서는 큰돈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하면서 친구의 우정을 돈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정으로 판단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며칠 동안 저는 친구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모진 말로 친구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는 생각에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어른이 된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저처럼 나이만 먹었지 마음이 성숙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지요. 제 친구는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싸우고 있지만 마음만은 성숙해진 것이 아닐까요? 그 친구는 반드시 이겨낼 겁니다. 너무나 큰 시련이 그를 더욱 성숙해지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왜 모를까요? 누구에게나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 거라는 것을…. 그것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데, 모르고 지내다가 막상 닥치고 보면 우왕좌왕하면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고생하는지…. 저는 제가 가지고 있던 돈을 그 친구 부인에게 모두 건네주고 싶었습니다. 이 친구를 통해 얻은 교훈이 너무 값어치 있었고 내 친구가 갑자기 존경스러워졌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친구가 그걸 보고 뭐하는 거냐면서 야단을 쳐서 되레 더 민망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면서 그 친구의 축의금 2만5000원이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많아 돈의 귀함을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단돈 1원이 얼마나 귀중하고 또한 이 돈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축의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며 욕을 들으면서 부부가 함께 노력하였을까요? 남편 한 사람의 실직으로 온 식구가 산업전선에서 고생하고 있는 가족이 얼마나 많을까요? 요즘 경제가 어려워서 많은 사람이 고생하고 있는데 어렵다고 포기하면 일어날 수 없게 되지요.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우리 주변 모두가 힘들어하는데 이젠 나만이 아닌, 그리고 우리 가족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 서로가 감싸 주고 아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친구 꼭 성공할 겁니다. 저는 그 친구를 믿고 있거든요. 그 친구는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자신감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못 이길 정도로 어려운 시련은 주지 않는다고 하거든요. 그 시기만 잘 넘기면 더 좋은 세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고 있으니까요.⊙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윤희수님이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중간 제목은 편집자가 달았습니다. 이하 같습니다.)

가톨릭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님들이 서울시 장안동에 위치한 <시립아동상담치료센터>에서 근무를 하면서 <쌘뽈나우리 상담센터>의 일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시립아동상담치료센터는 1988년 서울시에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에 위탁한 시설로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가출, 비행, 약물중독, 그리고 부모님의 학대와 방임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 받은 아이들을 입소시켜 24시간 함께하는 시설입니다.
수녀님들은 밤 9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아이들을 찾아다니면서 거리 상담을 시작하였고, 거리에서 데리고 온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돌봄과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상담치료센터 안에 중학교 과정의 대안학교인 <쌘뽈나우리 대안학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중학생들이나 다양한 문제의 학생들이 저희와 함께 지내면서 상담과 24시간 입소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 안의 분노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배우기도 하고 상처를 극복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올해로 22년이 되는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아동, 청소년 가운데 신부님이 된 사람도 있고 자립에 성공한 사람도 있으나, 일부는 아직도 어려운 여건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청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자활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몇 년 전에 ‘쌘뽈나우리’라는 이름의 청소년 자활 공동체 회사를 차렸습니다. 이 회사는 미니어처와 피겨 등을 판매하던 중에 대대로 옹기를 구우며 사시던 60세가 넘으신 어른이 “이제는 내 옹기 기술을 나누면서 살고 싶다” 하시면서 황토 용기에 천일염을 넣어 구워서 저희에게 기술과 아이디어를 기부하셨습니다. 장인의 기술을 기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뛰어든 황토소금 사업
저희는 용기를 내어 KAIST에 계신 교수님께 성분 검사를 의뢰했는데 너무나 좋은 검사결과가 나왔습니다.
이런 분야에 무지한 수녀들이 우리 아이들에 대한 사랑 하나로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도 태어나면 이름이 있듯이 우리 소금에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아라원 황토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라는 바다의 순수 우리말이더라고요. 이름을 짓고 나니 옷을 입혀 주고 싶었습니다.
마침 저희 기관에 매주 미술 봉사를 하시던 포장 디자인의 전문가이신 대진대학교 미술학과 교수님이 황토색의 포장 디자인도 해 주셨습니다. 이름도 지었고, 옷도 입혔고, 성분도 알았습니다. 이제는 정직하게 좋은 제품을 만들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판로였습니다. 어제는 소금을 팔러 다녀왔습니다.
저희 수녀님들과 자활공동체 청소년들이 물건을 한가득 싣고 한강 성당에 가서 소금을 팔아 달라고 외치다 왔습니다.
물건을 판다는 것….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물건을 사 달라고 말을 꺼내기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습니다. 돈을 번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지 큰 체험을 하였습니다.
“소금 사세요”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너무 쑥스러웠습니다. 제 옆에 선 우리 아이들은 더 쑥스러워했습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이렇게 하면 하나도 못 팔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를 내었습니다. “소금 사세요!” 이 첫마디를 외치고 나자 제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래! 우리 아이들을 위해 외치자. 다른 부모님들도 자기 자식을 위해 쓸개 빼 놓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소금 사세요! 자활청소년들에게 힘을 실어 주세요!”
번듯한 상점도 아닌 시장 통로에서 좌판에 물건을 놓고 파는 어머니의 심정이었습니다. 저희의 마음을 알아차리신 분들께서 저희 옆에서 함께 외쳐 주셨습니다.
많은 분이 기꺼이 지갑을 열어 주셨습니다.
받기만 하던 우리, 사랑 나누기도 배워
어떤 분은 여러 개를 사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제일 비싼 것으로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후부터는 우리 아이들이 힘을 받기 시작하더니 훨씬 커진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소금 사 가세요. 황토에 구운 좋은 소금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팔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흐뭇하고 가슴 벅차게 감사했습니다.
소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조미료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 요소이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너무나 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돼라.’
청소년의 자립을 목적으로 시작한 쌘뽈나우리는 전남 신안산 천일염을 구입하고 수녀원에서 2년간 간수를 빼고 황토 용기에 넣어 황토 가마에서 830℃에서 30시간 이상을 굽고 포장하고 선물박스에 실어서 발송하는 것까지 우리 아이들과 수녀님들이 함께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친구들이 이름을 건 ‘아라원 황토소금’의 수익금 일부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다방면으로 받은 기부와 사랑에 대해 나누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빈곤, 한부모, 새터민, 다문화 가족 및 장애 환우를 둔 가족을 돕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받기만 했지만 이제 스스로 땀 흘려 벌면서 아주 미약하나마 조금씩 떼어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저희의 숙제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희망이 있기에 행복합니다.
특히 행복편지 가족 여러분이 계시기에 힘과 용기와 자신이 생깁니다.
여러분 덕분에 행복합니다.⊙
※ 이 내용은 안나 수녀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

어제 ‘자시’이면 어젯밤에 속하나요? 오늘 새벽에 속하나요? 오빠 제사였답니다.
저보다 네 살 위인 오빠 부부는 아홉 살, 열한 살 된 두 딸을 남겨 놓고 교통사고로 이승을 떠나 버렸지요.
고모인 저에게 ‘엄마’라고 부르며 성장한 두 딸 아이(조카)가 이제 스물아홉, 서른하나가 되었어요. ^^ 오우…. 그러고 보니 딱 이십년 되었네요.
오빠 딸로 9년, 제 딸로 20년을 살아온 두 녀석은 너무 바르고 예쁘게 잘 커서, 그저께 어버이날은 오빠 묘에 다녀오더니 어젠 자기네들 둘이서 제사 음식을 다 장만해 보겠다고 하데요. ^^
해마다 아들 제사상 앞에서 두 손녀딸이 바르게 잘 자라길, 그리고 그 손녀딸을 키워 주는 당신의 막내딸이 건강하길 기도하듯 중얼중얼 읊조리시던 아흔하나인 꼬부랑 제 어머니는 올해는 기운이 달리는지 그나마도 못하고 처연한 표정으로 아들의 영정을 바라보고 앉아 계셨어요.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 지나 놓고 보면 지당한 말이지만 그 시절 속에선 얼른 세월이 흘렀으면 했던 간절함 속에, 녀석들이 사춘기를 혹독하게 치렀었지요. 함께 허우적거리며 아파하며 그마저 ‘업장 소멸’이라 명하며 이만큼 업을 키워 갚았으니, 이만큼 더 보람차다고 나를 담금질했던 시절 속에서, 그럼에도 내가 진정 아이들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면 아이들이 그 사랑을 기필코 알아주리라 믿고 또 믿었더니, 그 몇 년 후에 내 배 아프지 않고 생긴 선물 같은 큰 딸(조카)이 그러데요. “엄마, 참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엄마를 통해서 진정 참는 것이 뭔지를 배웠어. 그리고 기다림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도 깨달았어. 엄마, 정말 사랑해.”
그랬었지요. 정말 힘이 들 때에도 그래도 내가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가서 오빠를 만나면 오빠가 칭찬 듬뿍 해 주실 거야. “얘야, 수고 많았다. 그리고 기특하고 고맙다”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거야 하며 견뎠는데, 너무나 잘 자라준 녀석들은 이제는 다 큰 의젓한 어른이 되어 오히려 나를 보호해 주고 돌봐준답니다.
오빠의 두 딸이 내 인생의 자산이 될 줄이야
그렇지요. 제가 몸이 많이 아팠을 때 제 곁에서 지극정성으로 저를 돌봐줬던 두 녀석. 어찌 저에게 큰 선물이 아니겠어요. 네, 정말 그렇습니다. 주변의 무정한 사람들이 덩그러니 남은 두 녀석을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을 때, 이 두 아이를 내 배 아프지 않고 생긴 내 딸로 생각하며 기필코 훌륭하게 잘 키워 내리라. 굳은 결심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꺼이 껴안았었지요.
얼마나 잘한 일이었는지요. 저는 지금 두 녀석에게 너무 감사해요. 이 두 녀석이 내 인생의 축복이라 일컬으며 내 인생의 이 특별한 보너스를 정말 감사하다고…. 살아생전 애주가였던 오빠에게 술 한 잔 올리며 어머니 대신 제가 기도하듯 중얼중얼 읊조렸습니다.
오빠가 준 선물, 오빠가 나에게 준 이 특별한 보너스…. 정말 고맙다고요.^^ 부끄럽습니다.
감동이랄 것도 없는데…. 그냥 오빠 제사를 지낸 그날 아침, 행복편지 읽고서 제 감회를 몇 자 적어 본 것인데 민망스럽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
오빠 장례식장에서 문상 온 친척들이 아이 둘을 고아원에 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정말 자존심 상했었지요. 그리고 빳빳하게 고개를 드는 오기. 내가 정말 사랑했던 내 피붙이가 고아원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리고 그들에게 보란 듯이 훌륭하게 잘 키워 내리라, 굳게 다짐했었어요.
다행히 아이들은 기도 속에서 너무 감사하게 잘 자라 주었고 지금 녀석들은 제 든든한 재산이 되었어요. 함께 영화관이나 공연장엘 가더라도 엄마가 어리버리 시원찮아 보이는지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게 보호하느라 꼭 보디가드처럼 에워싸고 보호하며 들어가는 모습이라니. 제가 녀석들과 함께 다니면 마치 영부인이라도 된 기분이라니까요.^^ 그러나 어떨 땐 길가다가도 내 뒤를 쫓아오면서 “엄마! 아줌마처럼 걷지 말고 똑바로 아가씨처럼 걸어야지! 무릎 더 붙이고, 허리 쭉 펴고 걸어!” 하며 관리 감독을 한다든지 화장하기 귀찮아 민낯으로 외출할라치면 화장하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고 외출하라고 마구 나무라고 간섭하고.^^ 마치 사감 선생님 같아요. 사랑스러운 사감 선생님.^^ 그럴 땐 나를 다듬어 주는 녀석들의 애착에 참 뿌듯한 기분이지요. 예전엔 내가 아이들을 다듬어 줬었는데 말이죠.^^
우리 두 아이들과 사이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언젠가 큰딸(조카)이 저에게 그랬어요. “엄마, 생각해 보면 동생들에게 너무 고마워. 나를 잘 따라 줘서.”
자식 넷 가진 부모가 되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우스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네요. 옛날, 아이들 초등학교 다닐 때 휴일날 어머니 모시고 나들이를 다녀올 일이 있었어요. 저는 큰 녀석에게 동생들 잘 챙기라고 당부를 하고 아침 일찍 어머니랑 함께 외출했다가 밤에 돌아와 보니 네 녀석이 깜깜한 거실 한가운데서 천장 바라보며 일자로 나란히 누워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서 “너희들 왜 이러고 있냐?”고 물어보니까 제 아들 녀석이 그래요.
“으응, 누나가 움직이면 배 꺼진다고, 가만히 누워 있으래요.” 아이고, 큰 녀석이 동생들 밥 차려 주기 귀찮아서 그랬다나요.^^ 우린 요즘도 큰 녀석 놀린다고 그 얘길 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이젠 제발 그 사건은 잊어 달라고 막 민망해해요.^^
대학교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아들이 힘든 과제로 시간에 쫓기고 있을 땐 세 놈이 모두 학교 작업실로 달려가서 모델 만드는 것 밤샘작업 하면서 도와주고 몸살이 나서 합동으로 끙끙대며 앓아 눕고…. 성탄절이나 가족들 생일 때에는 넷이서 한꺼번에 마트에 몰려가서 시장 봐다가 무슨 작당들을 하는지 킥킥대면서 모의들을 해서는 어른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물하는 등…, 제 두 아이들에게 너무나 근사하고 든든한 언니, 누나들이 되어 있는 녀석들이 제가 어찌 고맙지 않겠어요.
나름 다소 냉소적인 녀석들을 긍정적으로 껴안고 이해해 주는 내 두 아이들의 맺히지 않은 선한 심성들도 관계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큰 녀석이 저에게 그러데요. 제가 큰 조카 녀석 손을 꼭 쥐고 고맙다고 그랬을 때 말이지요. 녀석들 사춘기 때 동생들에게 고약을 막 부려도 동생들은 둘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며 이해하고 껴안아 주었으니까요.
네. 지나고 보니 아무리 힘든 시절도 곧 지나가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다 해결해 주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성심(誠心)이라고 생각해요. 성심으로 임하니 모든 것이 잘 풀리더라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제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니 제가 자랑하고 나설 일도 아니지요. 누구나 다 자기 조카를 고아원에 보내지는 않을 겁니다. 당연한 일인걸요. 그럼요. 너무 행복하고 따뜻한 가정을 함께 만들어 주고 있는 네 명의 아이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지요. 행복, 멀리 있 것이 아니고 바로 나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 행복편지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네요. 너무 감사합니다.⊙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김인희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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