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7. 13.

장재선의 문학노트

이런 남자 많아지면 진짜 선진국 된다장재선의 취재마당 | 2012-01-04 11:24:18
장재선(jeijei2)http://cafe.munhwa.com/literarture/5073 

윗 사진은 임정현 문화일보 차장 촬영.
아래는 박시호 사진작품 ‘게발선인장’.

문화일보 기획 '사랑과 희망의 전령사'로 박시호 행복편지 발행인을 만났습니다. 사실 처음에 큰 기대가 없었습니다. 좋은 내용을 담은 편지들이 넘치는 세상 아닙니까. 저는 솔직히 지겨워서 그런 편지들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독자들에게 재미있는 내용을 전할 수 있을까.

그런데 박시호 선생을 만나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그에게 가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진정성이 또렷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웃음에 따라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진심은 통한다, 라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했습니다.

무엇보다 전직 관료인 그에게서 목에 은근히 힘주는 태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직의 프리미엄을 벗어던지고 현재의 일에만 열중하는 남자의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이런 남자들이 많아지면 우리도 진짜 선진국이 되는 것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가 국민소득이 5만불이 되어도 선진국은 요원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을 누르고 내가 이겨야만 하는 풍토에서는 멀고 먼 선진국이지요. 정치 경제를 풍성하게 가꿔야 하는 문화가 하위 장르, 혹은 액세서리로 취급받는 나라로서는...
그런데 요런 남자들이 많아지면 조금, 아주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요.

저는 왠만한 책에 감동받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수백여권의 책을 검토해야 하는 처지로서, 어떤 내용에도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지요. 그러나 박시호 선생의 책을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집에 갖고 가서 아이들에게 읽어줬지요. 아이들은 이미 들은 이야기라면서도 수굿이 듣더군요. 자정 가가까운 시각에도.


- 다음은 문화일보에 실린 인터뷰 본문



“행복 편지 때문에 큰 사고를 쳤습니다. 그동안 저는 불우이웃돕기를 남의 일로만 알았습니다. 행복 편지를 통해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남을 돕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번에 제가 생각해도 어마어마하게 큰돈을 기부했습니다. 나는 왜 그동안 나만을 생각하고 살았는지 반성을 한 덕분입니다.”(기업체 전무로 일하는 50대 남성)

“행복 편지에서 지누션-정혜영 부부의 기부 사연을 읽었습니다. 제 가족도 매일 1000원씩 모으기로 했습니다. 1년에 36만5000원인데, 연말에 가족이 고아원을 방문해 돈을 기부하고 그곳 아이들과 하루를 지내고 옵니다. 저보다 제 아이들이 너무 행복하게 여깁니다. 이런 일을 왜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을까요?”(30대 중반의 가장)

여기서 ‘행복 편지’는 박시호(57) 전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이 e메일로 보내는 글을 말한다. 박 전 이사장은 지난 2003년부터 매일 아침 지인 500명에게 감동적인 글을 보내왔다. 행복 편지 발행인으로서 9년째 쉼없이 사랑과 희망을 전해왔다. 수신인은 장차관 등 고위 관료와 대기업 총수부터 평범한 직장인과 주부까지 아우른다. 수신인들은 또 자기가 아는 지인들에게 행복 편지를 전하면서 감동을 공유하고, 홈페이지(sihopark.com.ne.kr)를 통해 좋은 자료를 나눈다.

문화일보에서 만난 박 전 이사장은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는 사람을 반드시 만나서 행복 편지의 뜻에 공감하는지를 확인한 후에 메일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행복 편지의 소망은, 스스로 긍정과 희망의 정신으로 살며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한 기운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을 담은 편지는 교훈적 메시지를 담느라 자칫 식상하거나 지루하기 쉽다. 그러나 박 전 이사장의 행복 편지를 읽다보면 코허리가 시큰해져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모두가 실화라는데, 어쩌면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들만을 모았을까.

가난한 집안을 탓하며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던 딸이 눈을 다쳐서 한쪽 눈을 실명하자 딸 몰래 자신의 망막을 주고는 다른 장기를 팔아서 돈을 남겨주고 세상을 떠난 엄마의 이야기, 조실부모한 자신을 사랑으로 품어주던 시어머니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것을 회상하는 며느리의 절절한 ‘사모곡’, 가출 청소년들의 대안학교를 운영하는 수녀들이 아이들과 함께 생산한 황토 소금을 팔러 다니는 내용 등….

“처음엔 ‘불순한’ 목적이 있었어요.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선거 때 내세울 수 있는 글 자료를 모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글을 혼자 보기가 아까워서 가까운 사람에게 보내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하다보니 굳이 의원 출마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 행복을 전하는 일을 하는데, 의원이 되겠다고 하면 순수성이 훼손될 것이 분명하잖아요.”

그가 500명에게만 메일을 보내는 것은 개인 e메일을 통해 무료로 보낼 수 있는 한도가 있기 때문이다. e메일 발송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에 비용을 지불하고 보내게 되면 역시 순수성이 다칠 우려가 있다고 본 것이다.

“행복 편지를 받아 보는 분들끼리 오프라인 모임을 하고, 좋은 자료를 주고받곤 합니다. 가족 단위로 모여서 연극, 뮤지컬 등 공연을 함께 보거나 고아원 방문 등의 행사를 하지요. 최근에 영화 관련 일을 하시는 한 회원이 가출청소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서 영화 강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행복 편지 수신인들은 단순히 글을 받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편지의 내용과 방향에 대한 조언을 적극적으로 한다. 이런 피드백이 없으면 수신인에서 제외한다는 것이 박 전 이사장의 설명이다.

지난 2008년부터 매해 한 권씩 나오고 있는 책의 내용과 편집 방향 등에 대해서도 회원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역시 행복 편지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책은 한 해 동안 사람들의 공감을 많이 샀던 글과 함께 박 전 이사장이 직접 찍은 풍경과 꽃 사진을 담고 있다.

“연말에 카드, 연하장을 보내는 대신에 책 한 권을 선물하자는 취지입니다. 택배비까지 포함해 한 권에 5000원인데, 회원들이 요청한 만큼만 책을 찍습니다. 첫해엔 1만8000권이었는데 점점 늘어나서 올해는 2만8000권 펴냈습니다.”

고급 지질에 컬러 사진을 담은 책을 출간하는 데는 종이, 인쇄, 택배 회사 등의 협찬이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책 수익금은 많지 않지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기부한다.

“강연과 사진 판매 수익금도 기부합니다. 1년에 2000만원 정도 되는데, 기쁨은 그보다 훨씬 크지요.”

그는 대학과 기업 등의 초청을 받아 활발히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안양교도소의 수인들에게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는 취지의 강의를 했다.

행복 편지와 관련된 강연을 많이 다녀서일까. 그는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활기차게 말을 이어갔다.

“원래는 이렇게 웃는 얼굴이 아니었어요. 제가 외환위기 때 예금보험공사 특별조사 부장을 했어요. 부실 기업과 금융기관 조사를 했어요. 일 자체의 성격이 그래서였겠지만 냉정한 표정을 지었지요. 그 일을 하면서 과연 인생의 행복이 뭐냐는 생각을 했어요. 그룹 회장, 기업체 사장, 금융기관장을 할 때는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았을 텐데 민형사 처벌의 대상이 되니…. 그때 진정한 행복은 남과 더불어 사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남에게 행복을 전하기 위해 나 스스로 행복한 마음을 가져야 하니 웃어 보자고 다짐했어요. 그때부터 표정이 이렇게 바뀌더군요.”

그의 말투는 정리금융공사와 우체국예금보험지원 등 두 군데의 공사에서 수장을 지낸 사람답지 않게 소탈했다. 이른바 전관들에게서 보이는 허세(虛勢)가 전혀 없다.

인터뷰를 하러 올 때 젊은이들처럼 배낭을 메고 왔던 그는 스스로를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고 소개했다. “컴퓨터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영상 편집을 컴으로 하는 방법을 익혔을 정도예요. 국회에 근무할 때 직원들에게 컴 강의를 했지요. 요즘도 스마트폰 기능을 친구들에게 가르쳐주곤 합니다. 첨단 기기의 기능을 몰라도 살 수는 있지만, 조금만 노력해서 익혀두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하지요.”

그는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선용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나 잘못 사용했을 때의 문제점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터넷의 악플로 사람이 죽기까지 하잖아요.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교육을 받는 탓이에요.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이지요. 더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이기적인 의식은, 강한 악플을 달아서 희열을 느끼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댓글 실명제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적절한 규제는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제가 행복 편지를 열심히 보내고 있지만, 과연 (병든 세상을) 얼마나 변하게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선한 생각을 하다보면 사회가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앞으로도 열심히 행복 편지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소박스- 김중만에게 배운 사진으로 기부 활동

박시호 전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은 유명 사진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사진 기부’를 한다. 우선 책 ‘행복 편지’의 배경으로 활용한다. 자선단체나 학교 등의 요청으로 사진을 기증하는 일도 많다. 기업체에서 달력을 만들겠다며 꽃 사진 작품을 사 가면, 그 수익금을 불우이웃에게 기부한다.

그에게 사진을 배우게 된 계기를 묻자, 뜻밖에도 “한(恨) 때문이었다”는 답을 했다. 어렸을 때 예체능에 재질이 있던 그는 미술대학에 가고 싶어했으나 형이 이미 미대를 다니고 있던 탓에 부모의 만류로 어쩔 수 없이 경영대에 들어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입사한 한국타이어에서 당시 사장으로 있던 나웅배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을 만나서 그의 보좌관으로, 비서관으로 17년을 지냈다.

“제가 예금보험공사에서 일하던 1996년도에 미술 공부를 시작했지요. 화가인 아내에게 3년간 배웠는데, 작품 세계에 한계를 느껴서 사진으로 바꿨어요.”

그는 고교 동창인 사진작가 김중만씨에게 사진을 들고 가서 보여줬다. 김씨가 “이게 무엇을 찍은 것이냐. 메시지가 없다”고 질책하는 바람에 수없이 사진을 찍어 가는 일을 반복했다. 김씨는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 그에게 주택 대출 주선을 부탁하는 등 허물없는 친구였으나, 사진에 있어서만은 엄격한 스승이었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 분명한 목표를 정하라”는 김씨의 조언으로 꽃 사진만 찍기로 했다. “3년쯤 지나니 중만이가 ‘기술은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이제부터 스스로 길을 찾으라’고 하더군요. 이후 꽃 사진 작업을 혼자 꾸준히 해 오고 있어요. 제가 찍은 사진이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덕분에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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