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7.

월간조선 10월호 - 박시호의 행복편지


  1.  
  2. 문화 · 연재
2012년 10월호
  1. 문화 ·  
  2. 연재 

[박시호의 행복편지] 일곱 살 편지 /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 어머니… 생각만 해도 왜 눈물이 날까

글 : 박시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사진 : 박한나 Illustrator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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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호 happyletter.park@gmail.com 
⊙ 57세.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동국대 법무대학원 문화예술관련법
    석사 과정.
⊙ 재무부장관 비서관,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http://sihopark.com.ne.kr twitter@parksiho 

박한나 parkreative@gmail.com 
⊙ 홍익대 국제디자인박사 디자인학 과정(휴학).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석사(Illustration 전공).
⊙ 前 제일기획 아트 디렉터.
⊙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작가 활동 중.
  
일곱 살 편지


  아내가 어이없이 우리 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간 지 어느덧 4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만 합니다. 어느 날인가 새벽같이 지방으로 출장을 가야 하기 때문에 아이에게 아침도 챙겨주지 못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와서 아이와 인사를 나눈 뒤 양복 상의를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침대에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그 순간 침대 속에 무언가 뭉클한 것이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이불을 들춰보니 빨간 양념 국과 손가락 굵기만큼 분 라면이 침대 위에 퍼질러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컵라면이 이불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는 뒷전으로 하고 자기 방에서 동화책을 읽던 아이를 붙잡아 장딴지며 엉덩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왜 아빠를 속상하게 해? 컵라면을 이불 속에 넣어 놓으면 어떻게 해. 이불 다 버렸잖아” 하며 때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을 때 아들 녀석의 울음 섞인 몇 마디가 제 손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빠가 가스레인지 불을 함부로 켜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서 보일러 온도를 높여서 데운 물을 컵라면에 부어서 하나는 자기가 먹고 하나는 아빠 드리려고 식을까 봐 이불 속에 넣어둔 것이라고… 그 순간 제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아들 앞에서 눈물 보이기가 싫어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저는 제 나름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그 후 아이에게 또 매를 드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을 하고 있는데 회사로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아이가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 있느냐고… 저는 아이가 유치원을 가는 도중에 무슨 사고가 났는지 걱정이 되었고, 다급해진 마음에 회사에서 조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가 갈 만한 곳은 모두 찾아 헤매면서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혼자 놀이터 한 귀퉁이에서 놀고 있더군요. 저는 화가 난 마음에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마구 때렸습니다. 왜 유치원에도 가지 않고 혼자서 놀이터에서 놀고 있느냐? 아빠가 놀라서 너를 찾으러 얼마나 많이 헤매고 다닌 줄 아느냐고… 하지만 아이는 단 한 차례의 변명도 하지 않고 무조건 잘못했다고만 하면서 빌더군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은 유치원에서 부모님들을 모셔놓고 재롱잔치를 하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남들은 다 엄마와 함께 와서 유치원에서 재롱을 보이는데 자기는 엄마가 없어서 유치원에 가지 않고 혼자 놀이터에 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아이는 유치원에서 글자를 배웠다며 하루종일 자기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글을 써댔습니다.
  
  1년이 지나고 아이는 초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 차례 큰 사고를 쳤습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퇴근을 하려고 하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우리 동네 우체국 출장소였는데 우리 아이가 주소도 쓰지 않고 우표도 붙이지 않은 채 300여 통의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바람에 가뜩이나 바쁜 연말에 우체국 업무에 지장을 끼친다고 온 전화였습니다. 아이가 일 저질렀다는 생각에 집으로 와서 또 매를 들었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맞는데도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은 채 잘못했다는 말만 하더군요.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받아온 후 아이를 불러놓고 왜 이런 짓을 했느냐고 하니 아이는 울먹이며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한테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순간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하겠더군요.
  
  아이에게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왜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느냐고… 
  
  그러자 아이는 그동안 키가 닿지 않아 써오기만 했는데 오늘 가보니깐 손이 닿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다 들고 가서 편지를 다 보내게 됐다고…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엄마는 하늘나라에 있다고, 하늘나라에 있는 엄마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도 받을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다음부턴 적어서 태워버리면 엄마가 볼 수 있다고… 너무나 가슴이 메어왔습니다. 아이에게 엄마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아이가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으면 이렇게 매일 엄마에게 편지를 썼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밖으로 편지를 들고 나와 라이터 불을 켰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편지 하나를 들었습니다.
  
  ‘보고 싶은 엄마에게. 
  엄마 지난주에 우리 유치원에서 재롱잔치 했어 
  근데 난 엄마가 없어서 가지 않았어.
  아빠한테 말하면 엄마 생각날까 봐 말하지 않았어. 
  아빠가 날 막 찾는 소리에 그냥 혼자서 재미있게 노는 척했어.
  그래서 아빠가 날 마구 때렸는데 얘기하면 아빠가 울까 봐 
  절대로 얘기 안 했어.
  나 매일 아빠가 엄마 생각하면서 우는 것 봤어.
  근데 나는 이제 엄마 생각 안 나.
  아니 엄마 얼굴이 기억이 안 나.
  보고 싶은 사람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자면 그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고 아빠가 그랬어.
  그러니깐 엄마 내 꿈에 한 번만 나타나.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약속해야 돼.’
  
  편지를 보고 또 한번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아내의 빈자리를 제가 채울 순 없는 걸까요.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아이에게는 엄마가 잊히지 않는가 봅니다.
  
  우리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데 엄마 사랑을 못 받고 있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정말이지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 크기만 합니다. 
  
  ‘혁수야, 아빠야. 
  우리 혁수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아빠는 그런 것도 하나도 모르고.
  엄마의 빈자리 아빠가 다 채워줄 수는 없는 거니?
  남자끼린 통한다고 하잖아.
  혁수야 너 요즘에도 엄마한테 편지 쓰지.
  아빠 너 하늘로 편지 보내는 거 많이 봤다.
  엄마가 하늘에서 그 편지 받으면 즐거워하고 
  때론 슬퍼서 울기도 하겠지.
  혁수야 넌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어.
  그걸 잊지 마. 
  아빠가 널 때린다고 엄마가 혁수를 놔두고 갔다고 섭섭해 하지 마. 
  알겠지? 
  사랑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들’
  
  사람들은 종종 아이들이 한없고 작고, 어리고, 생각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큰 생각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른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가족 간의 사랑만큼 더 존엄하고 성스러운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들 혁수를 정말로 훌륭하게 키우렵니다. 혁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아들이니까요.
  
  ※ 이 글은 행복편지 가족 김현동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저는 모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간호사입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그토록 원하던 간호사가 되었고, 병원에 입사하여 처음 배치받은 곳이 중환자실이었는데 지금 8년차에 다시 중환자실에서 중환자들을 간호하고 있습니다.
  
  중환자실은 특성상 인공호흡기를 하고 계신 분들, 그리고 의식이 온전치 못한 환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대학 4년 동안 배운 이론과 실습을 바탕으로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나름 정성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았지만 막상 중환자실에서 처음 환자들을 간호할 때는 긴장도 많이 되고 실수와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을 볼 때면 마음이 많이 아프고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년, 2년 시간이 지날수록 초심은 변하고 모든 것이 조금씩 무뎌지기 시작했습니다. 중환자들이나 죽음에 임박한 환자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을 볼 때도 처음처럼 마음이 아프고 떨리기보다는 그냥 늘 접하는 일처럼 무뎌져 버렸습니다. 사실 그렇게 무뎌지지 않으면 간호사 일을 계속하는 게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중환자들을 그저 무덤덤하게 간호하던 몇 개월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흔이 넘은 할머니께서 폐렴으로 일반병실에 입원해 있던 중 호흡곤란으로 급히 저의 중환자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내려오시자마자 의료진에게 둘러싸여 기관 삽관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응급조치가 끝난 뒤 가족 면회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할머니의 보호자로 여든 정도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수면유도제를 맞고 주무시는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눈물만 흘리며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중환자실의 특성상 하루에 두 번 30분의 면회시간 외에는 가족들이 계속 옆에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30분 후 할아버지는 중환자실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면회시간이 되자 할아버지는 젖은 수건 한 장을 들고 들어오셔서는 할머니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고는 할머니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오늘따라 참 예쁘네. 동네에 벚꽃이 한창이던데 얼른 일어나서 꽃구경 가야지” 하며 한참을 속삭이셨습니다. 그러곤 30분이 지나자 할머니 볼에 뽀뽀를 하고는 중환자실을 나가셨습니다.
  
  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아무리 의식이 없는 환자라도 가족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있다고, 그러니까 환자에게 상처 주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오히려 환자에게 좋은 말, 행복했던 추억,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매일 면회시간이면 할아버지는 항상 과자 몇 봉지를 사들고 와서는 저희에게 나눠주고 나서 젖은 수건으로 할머니의 얼굴이며 손발을 닦아주시면서 “오늘은 더 예쁘네. 텃밭에 상추가 얼마나 잘 자랐는데… 내가 여기 간호사들한테 좀 갖다줘야겠어!” 마치 옆에 있는 할머니와 다정한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늘 할머니에게 이 얘기, 저 얘기 하시고는 항상 마지막엔 뽀뽀를 하고 나가셨어요. 그렇게 시간이 한 달 보름쯤 지났으나 할머니는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셨습니다. 보호자라고 해봐야 할아버지 한 분밖에 안 계신지라 할머니의 상태를 정확히 말씀드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마음이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할아버지께 제가 여쭤봤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정말 좋으시겠어요. 할아버지처럼 할머니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분이 계셔서요.”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저에게 “좋긴, 나이 열여덟에 나한테 시집 와서 고생만 많이 했지. 호강 한번 못 시켜주고 자식이라고 아들 하나 있던 것이 교통사고로 세상 먼저 뜨고… 자식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어미의 마음을 누가 알 수 있겠어? 그 마음은 아무도 몰라… 지금까지 용케 잘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맙지… 그 이후엔 우리 한 번도 우리 집을 떠나본 적이 없어. 여행을 가자고 해도 절대로 갈 수 없다고… 자식을 잃은 어미가 뭐 좋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노느냐고 하면서 절대로 안 간다고 해서 이 나이까지 여행 한 번도 못 데리고 갔어….” 할아버지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저에게 이런 말도 했습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해… 젊었을 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사소한 일들이 지나고 보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지 젊은이들은 모르고 살지… 더군다나 할망구가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돼… 우리는 지금 눈이 있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손이 있어 만지고 느낄 수도 있고, 발이 있어 원하는 곳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이 다 저절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소중한 줄을 모르고 사는데 그 소중함을 알아야 해. 나이 들고 병이 나면 가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잖아. 그 고마움을 알고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해.”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할 일이 있고, 날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내가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 줄 알아? 그리고 집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고 함께 따뜻한 밥 먹으면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한 몸 쉴 수 있는 가정이 있고 날 반겨주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또 “그동안은 잘 모르고 지나치던 아침 햇살이 고맙고, 길가의 향기로운 꽃들이 고맙고, 길에서 만나는 이웃이 고맙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건강한 몸을 지니고 사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늙고 병든 후에 알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이 좋은 세상을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저는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날 밤 할머니는 결국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셨고, 보호자 대기실에서 주무시던 할아버지를 찾아가 급히 깨웠습니다.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도 할아버지는 금방 눈을 뜨셨는데, 저는 차마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 할아버지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를 보시고는 오히려 저의 어깨를 다독이며 “가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 할머니의 심장 박동수는 점차 느려졌고,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으시고는 “편히 가라. 다음 생에도 꼭 나랑 결혼하자. 그때는 내가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왕비처럼 행복하게 해줄게”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할머니의 심장은 멈췄습니다. 할머니는 평온한 모습으로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렇게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볼에 뽀뽀를 해주셨고, 할머니의 가시는 길을 왕비 대하듯 지켜주셨습니다. 비록 할머니께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셨지만 떠나실 때까지 얼마나 행복한 마음으로 떠나셨을까? 나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두 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그동안 못 해본 여행도 실컷 하고 못다한 사랑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랑 나누면 좋겠다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후로 그 할아버지를 뵐 순 없었지만 할머니를 향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금도 제 무뎌져 버린 심장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이런 건가 봅니다.
  
  ※ 이 글은 행복편지 가족 정미자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어머니… 생각만 해도 왜 눈물이 날까


  오늘 저는 어머니와 관련하여 너무 후회스러운 일이 있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가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거든요. 사실 파킨슨병이 몇 년 전인가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하던 미국의 전 권투선수가 걸린 병이라는 것만 알았지, 어떤 병인지 그리고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였는데 막상 어머니가 파킨슨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손을 조금씩 떨기 시작했는데 저와 우리 가족은 모두 어머니의 지병인 당뇨의 합병증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해마다 하는 검진이나 자주 가시는 병원에서도 다른 말씀이 없어서 당뇨 관리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4~5년 전부터 어머니는 식사를 할 때 손을 좀 떨기도 하였고, 날이 가면 갈수록 언제부터인지 젓가락 사용을 줄이시고 가끔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드셔서 속으로 속상하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어머니는 저희가 어릴 적부터 식탁의 예절을 따끔하게 가르쳐주시던 분이셨기에 더 이상했지요. “엄마. 왜 젓가락 사용을 안 하고 손으로 음식을 드세요?”라고 해본 적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글쎄다. 자꾸 손이 떨려서 음식이 제대로 안 집어져서 그래…”라고 하셨지요. 그런데도 식구들 아무도 신경을 안 쓰고 나이가 들어서 저러는가 보다 하며 무관심한 상태로 지나쳐버렸거든요. 지금 그런 말을 했던 저 자신이 너무 후회되고 어머니의 몸 상태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 모두 큰맘을 먹고 모든 일 다 뒤로 미루고 모였습니다. 마침 외삼촌과 이모네 가족까지 다 와주었습니다. 사실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고 먹고살기 힘들 때에는 각자 먹고살기 바빠서 이렇게 온 가족이 한꺼번에 모인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쉽지는 않잖아요. 아무튼 많은 가족이 어머니 집에 다 모였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치 어린 소녀처럼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도 신이 나서 옥타브가 더 하이소프라노로 올라갔습니다. 오랜만에 자식 손주들이 다 모였다면서 자식과 손주들을 한 명씩 안아주셨습니다. 어머니의 떨리는 손과 몸을 보면서 자식들은 안타까워하며 오히려 자식들이 어머니를 더 꽉 안아드렸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날 밤 식사를 마치고 엄마 옆에 함께 누워 엄마의 계속적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쥐고 엄마 눈을 바라보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였습니다. 엄마의 눈은 젊었을 때는 참으로 맑고 아름다웠거든요. 아버지도 엄마의 맑은 눈이 예뻐 쫓아다녔고 엄마가 싫다고 해도 매일같이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사랑을 만들어갔거든요.
  
  “엄마. 지금 무슨 생각해?” 
  
  “글쎄. 아무 생각도 없어.”
  
  “엄마. 지금까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때가 언제야?”
  
  “응? 글쎄다 30대 때였을까 아니다 40대 때가 제일 행복했던 것 같은데… 그때는 돈도 없고 먹고살기도 바빠서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돈 열심히 벌어서 자식들 먹여 살리고 공부시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바빴지.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고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아. 그 다음부터가 오히려 더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니 아버지 쓰러지시고 병수발 하느라 정신없었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눈만 끔벅이며 식물인간으로 누워서 세월만 보내던 아버지를 살리려고 안 해 본 것이 없고, 안 가본 곳이 없이 정신없이 살았는데, 니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시고 그냥 하늘나라로 떠나지 않았니. 그때는 참으로 야속하더라.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떠나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생만 시키고 떠나지 않았니.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니 그래도 말은 못 해도 옆에 숨만 쉬고 있다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었지. 아예 우리 곁을 떠나니까 너무 허전하더라.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지 않니. 지금 내 소망은 빨리 하늘나라로 가서 니 아버지 만나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어.”
  
  그러는 엄마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기 전에는 두 분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았거든요. 우리 자식들이 시샘할 정도로 두 분이 사랑을 했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신 후부터 어머니는 아버지 병수발을 하면서 십수 년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아이들 뒤치다꺼리에다 아버지 병수발까지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어머니가 왜 이렇게 어렵게 한평생을 살아야만 하나 생각을 하면서 때로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한 아무것도 도와드릴 수 없는 나약한 제 모습을 보면서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엄마,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아니. 없어. 그냥 잘 죽어야 할 텐데. 너희 고생시키지 않고…”
  
  “엄마는 왜 그런 말을 해. 아냐 엄마는 오래 살 수 있어. 요즘은 약이 좋아져서 어떤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대. 암에 걸려도 완치된 사람들이 많잖아. 중요한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식사 잘 하고, 건강하게 매일 운동하고 마음 편히 먹으면 나을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데 엄마. 무슨 고민이나 걱정 남아 있는 게 있어?”
  
  “없어. 아니다. 있다. 너나 네 오빠는 지금 그런대로 그냥 살고 있으니 내가 별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막내가 늘 걱정이다. 왜 막내는 일이 그렇게도 안 풀린다니? 왜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고, 내가 죽기 전에 잘되는 것 보고 가야 하는데 그게 걱정이다.” 어머니는 아픈 상태에서도 다 큰 막내아들 걱정에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부모는 역시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 걱정을 하면서 사는 것인가 봅니다.
  
  “엄마. 이번에 알게 된 병 받아들이기 힘들지?”
  
  “그래.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살면서 내가 누구에게 죄를 진 것도 없고, 남에게 해를 끼친 것도 없잖아. 오직 자식들 잘 자라게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산 것밖에 없는데 왜 나에게 이런 힘든 고통을 주는지,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어떤 사람은 평생을 남을 부려가며 편하게 살고, 나쁜 짓 하고도 잘살기만 하던데, 우리는 누구 돈 일 원 한 장 떼어먹은 적도 없고, 네 아버지 병수발하면서 자식들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게 열심히 뒷바라지한 것밖에 없는데 나에게는 왜 이런 병을 주셨는지 하느님이 참 밉기도 하다. 이렇게 손이 떨리고 흔들거리고 천천히 걸으려고 마음먹어도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막 앞으로 급하게 가는 거야… 몸만 안 떨리면 살 것 같은데…”
  
  “엄마. 미안해. 엄마가 전에 손을 떨 때 내가 잘 알아차리고 뇌 검사를 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어.”
  
  “……” 엄마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쉬며 멍한 눈으로 천장만을 바라보셨습니다.
  
  “엄마. 그래도 요즘엔 좋은 약이 많으니까 포기하지 마. 내가 열심히 약 사다가 엄마 낫도록 할 테니까.” 저도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식만을 위해 사셨고, 아버지 병수발하느라 잠시도 집을 비우지도 못하고 사셨는데 왜 어머니에게 이런 힘든 고통을 주셨는지 하느님이 너무 미워졌습니다.
  
  마음을 진정하고 엄마의 눈을 들여다보니 아버지가 반했던 그 예뻤던 눈이 이제는 초점도 없이 멍하고 힘없는 눈이 되었습니다. 저희 엄마 눈은 정말 예뻤거든요. 그날 밤 저는 엄마랑 함께 잠을 잤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보행이 불편한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엉금엉금 기어서 이방 저방 모여서 자는 가족을 한 명씩 다 들여다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자식들이 저마다 어머니가 한 번만이라도 더 드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해온 음식들과 밑반찬들로 상을 차려드렸습니다. 그러나 두세 수저 드시곤 이내 수저를 내려놓았습니다. 조금만 더 드시라고 해도 고개를 살살 흔들며 뒤로 물러나더니 마당을 내다보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꽃밭 가꾸기를 정말 좋아했어요. 개나리, 진달래를 비롯한, 예쁜 팬지며 베고니아, 할미꽃, 며느리밥풀꽃이라는 꽃들이 사철 마당에 아름답게 피어 있었어요. 동네 마실 다니면서 예쁜 나무가 있으면 얻어다가 옮겨 심고 그 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아름다운 꽃이나 열매를 맺을 때면 마치 소녀처럼 너무 좋아하셨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떠나올 땐 모두 어머니를 한 번씩 꼭 안아드렸습니다. 참 자그마하고 몸이 얇다는 생각에 엄마랑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엄마 볼에 제 볼을 갖다대었습니다. 손자 손녀들도 어쩌면 할머니랑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눈시울을 붉히며 할머니, 외할머니를 꼭 안아드렸습니다. 우리 가족은 매일 밤 9시에는 모두가 어머니를 기억하며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자고 약속들을 하면서 헤어졌습니다.
  
  어머니… 
  
  왜 이 단어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지요.
  
  더 잘해 드릴걸.
  
  오직 자식들을 위한 희생밖에는 모르는 어머니…
  
  곱디고운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얼굴엔 온통 주름밖에 없는 삶의 흔적들을 보면 왜 이렇게 가슴이 저려 올까요? 
  
  음식을 손으로 먹는다고 제가 왜 핀잔을 하였을까요? 그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철없이 그동안 엄마 마음을 아프게 했던 말들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걸까요.
  
  “엄마. 고마워. 엄마 감사해. 엄마 사랑해…” 이런 말이라도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날 수 있고, 전화를 드릴 수 있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 아닐까요?
  
  어머니 오래 사세요. 아직 못다한 효도가 너무 많이 남았어요.
  
  ※ 이 글은 행복편지 가족 천명숙님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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