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5.

박시호의 행복편지 - 월간조선 2012. 1월호

월간 조선



  1.  
  2. 문화 · 연재
2012년 1월호
  1. 문화 ·  
  2. 연재 

박시호의 행복편지

My love와 아들 / 야학 선생님과 나 / 꽁까이의 보은

글 : 박시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그림 : 박한나 Illustrator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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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박시호의 행복편지’는 2003년부터 우리 사회에 행복을 전하겠다는 생각으로 박시호씨가 배달하기 시작한 편지입니다. ‘행복편지’는 박시호씨 본인이 찍은 사진이나 행복편지 수신자들이 보내준 좋은 내용들을 정리하여 매일 아침 7시에 음악과 함께 이메일을 통해 500명에게 전달됩니다. 박시호씨는 1년에 한 번씩 이런 내용을 모아 《행복편지》라는 책으로 출판(비매품)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 중에 행복편지 수신자들만이 보기에는 아까운 글과 사연들이 많아 이 중 일부를 뽑아 2012년 신년호부터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훈훈한 감동과 함께 행복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박시호 happyletter.park@gmail.com
⊙ 57세.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동국대 법무대학원 문화예술관련법
    석사 과정.
⊙ 재무부장관 비서관,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http://sihopark.com.ne.kr
    twitter@parksiho 

박한나 Illustrator parkreative@gmail.com
⊙ 홍익대 국제디자인박사 디자인학 과정(휴학).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석사(Illustration 전공).
⊙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작가 활동 중.
  
My love와 아들


  오늘 아침, 저는 출근하기 위해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고, 집사람은 싱크대에서 뭔가를 씻고 있었지요. 늘 아침이면 틀어 놓는 라디오에서 웨스트라이프가 부른 ‘My Love’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더군요. 우리 큰아이가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우리 큰놈은 2년 전 이맘때 갑작스런 사고로 대학 2학년의 꽃다운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지요. 큰아이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고, 또 부르기도 꽤 잘 불렀습니다. 우리 아이가 샤워할 때마다 욕실에서 노래를 크게 불러 밖에서도 들리곤 했는데, 그때 ‘My Love’도 잘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누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샤워 중에 노래를 부르는 시기가 인생에서 행복한 시기라고…. 그렇습니다. 저 역시 생각해 보니 옛날 한때는 샤워 중에 노래를 흥얼거리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사람도 아이가 좋아했던 노래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집사람은 싱크대에서 등만 보인 채 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일을 하고, 저는 고개 숙이고 넘어가지 않는 밥만 몇 숟가락 억지로 밀어 넣었습니다.
  
  며칠 전 큰아이의 생일날 아침에도 그랬습니다. 집사람은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를 굽고 찰밥을 지어 한 상 그득 아침상을 마련하였지요. 집사람과 나, 그리고 둘째놈이 주인공 없는 생일상을 받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꾸역꾸역 밥만 먹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상에 없는 아이의 생일상을 준비하는 어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니 차마 밥이 넘어가지 않더군요. 아이는 가도, 아이의 흔적은 도처에서 불쑥불쑥 뛰어나와 우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군요. 아이가 좋아했던 노래나 음식이나 책들에도, 집 앞의 모락산 등산길이나 동네 산책길에도 아이는 어디에나 남아 있어 저에게 말을 걸곤 합니다. “아빠, 잘 있지? 요즈음 어때요?” “그래, 문아, 너도 잘 있지? …” 다시 한번 ‘아빠’ 하고 부르는 우리 아이 특유의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허허, 얼마나 좋을까요. 서둘러 밥을 먹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출근합니다” 한마디 말만 남기고 사무실로 왔습니다. 
  
  하느님은 고통 없는 날들, 슬픔 없는 웃음, 비가 없는 해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날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 눈물에 대한 위안, 그리고 길을 비춰 줄 빛을 약속하셨습니다. 좋은 아침에 별로 행복하지 않은 신변 이야기를 중언부언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살아가면서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김인식님께서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 
  
[댓글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그 자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갈 경우에는 그 상흔이 오죽하겠습니까? 아침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모두가 그런 일이 없는 평온한 삶을 영위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하늘의 정해진 이치(?)를 벗어날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죄송합니다. 행복편지 가족 중에서도 이런 아픔을 가지고 계신데, 저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실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분개하곤 합니다. 제가 사는 세상은 사치스러운 생활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어찌하면 그분들께 위로가 될는지~ 오늘 사연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편지 너무 가슴 뭉클하네요. 인간의 삶 속에는 항상 뜻하지 않은 행복과 불행이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크기로 오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지요.
 
  ―마음이 짠하네요. 글 보낸 분에게 마음으로나마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히려 제가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집안 일 때문에 요즈음 마음이 너무 심란하고, 바깥일도 머리가 복잡해서, 심적으로 디프레스가 꽤 심한데…. 내가 처한 상황은 아무 것도 아니네요. 글 보낸 분에 비하면 사치스러운 것이네요. 많이 느끼고 갑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그리고 행복한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하면서 살아야겠지요.
 
  ―제 친구도 7월 말에 36살 난 아들을 앞세웠어요. 그 친구는 처음에 친구들한테 연락도 안 하고 혼자서 울고 있었는데, 그래도 남편이 옆에서 ‘그러지 말고 친구들한테 이야기도 하고 하면 더 나아질 거야’라고 하고 있을 때, 마침 한 친구가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하는 중에 이 친구가 울컥 하는 바람에 ‘너 왜 그래’ 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친구들 모두 연락하여 만나고 하였어요. 그런데 정말로 뭐라고 위로를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남편 앞세운 친구가 너는 그래도 옆에 남편이 있잖아,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 아들 둘은 아직 공부도 더해야지, 너는 나보다 낫다,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지? 그래도 아들이 결혼을 안 하고 간 것도 위안으로 삼아라 등등…. 위안을 하지만 어떤 말이 위안이 되겠어요?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그 부부께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야학 선생님과 나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느낄 수 있기에 감히 옮기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어려웠던 시절, 제가 어찌어찌하다가 강원도 인제군 남면에 있는 새마을청소년학교에서 야학 교사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길도 좋아지고 교통도 좋아졌지만 강원도 내설악의 산골이었지요. 더구나 보수를 지급하지 못하니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구할 수 없어 문을 닫게 될 처지에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달랑 저 하나. 그러니 국어, 영어, 수학은 물론이고 음악, 미술, 체육, 가정, 심지어는 가정실습까지 가르쳤습니다.
  
  정규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주간부과 야간부로 나누어 전 과목을 혼자 올라운드 플레이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학습이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주간부 아이들 중에는 산길을 두 시간 걸어서 학교에 오는 친구도 있었으니, 학교를 오가는 시간만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야간학부를 만들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새마을공장이 있어서 나이 스물 전후의 배움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1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왔습니다. 입학원서를 받고 개학식을 하고….
  
  야간부 학생들은 온종일 새마을공장에서 일을 마치면 우물에서 물 길어다 밥까지 해 먹고 수업에 옵니다. 아무리 배움이 좋다고 하지만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수업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늘어납니다.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제가 좋아하는 가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조그맣게 하면 자장가가 될 테니 큰 소리로 목청껏 불렀지요.
  
  그 시절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워낙 깊은 산골이라 통금 단속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커피를 끓여 나눠 마시며 잠을 깨우고, 커피가 떨어지면 설탕물을 나눠 마시며 공부했습니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나가고, 소양강 끝줄기로 천렵을 나가는 것이 자연학습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교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수줍은 모습을 하며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자신이 이 학교에 올 때는 ‘단지 신문이라도 잘 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야학에 왔는데 이제 자신을 꿈을 가지게 됐다고. 앞으로 꼭 대학에 가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를 가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어느새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습니다.
  
  올해 3월, 화가인 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 옛날에 강원도에서 야학선생님 한 적이 있느냐”고. 그러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저를 찾는 사연이 올라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찾은 제자가 아래의 글을 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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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생, 우리 나이로 오십하고도 세 살이지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딸은 이미 출가까지 시킨 엄마이자, 농사를 지으며 올해 서울에 소재한 대학교 사회복지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그때 그 시절 꿈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며 검정고시로, 끝내는 딸아이 출가시키고 제가 대학생이 되었답니다.
  
  동두천에 살면서 낮에는 제법 큰 농사를 지으며 오후에는 공부를 하고, 틈틈이 시를 써서 여러 곳에서 상도 많이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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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여 년이 지나 그 제자를 저희 한의원에서 만났습니다.
  
  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그 제자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만든 참기름과 된장을 가지고 동두천에서 달려왔습니다. 
  
  며칠 전, 스승의 날에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세상에 눈을 뜨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선생님은 제게 가장 귀한 분입니다.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고맙습니다. 멋진 날 되세요. 최** ” 
  
  비록 저는 그 제자처럼 열심히 살진 못했지만, 이런 멋진 제자를 둔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아니 저는 그 옛날 수학공식 몇 개, 영어단어 몇 개를 가르쳤지만 오히려 그 사람이 제 인생의 스승이겠지요.
  
  제자의 블로그에 올려진 2편의 글을 옮깁니다. 
  
  하나는 30년이 흘러 저와 전화통화를 한 이후 올린 글이고, 또 다른 한편은 저를 만나는 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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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날의 꿈
  
  1. 
  가슴 저 끝에 있던 어린 날의 기억이 보석처럼 되살아났다. 
  
  가난했지만 꿈이 있어 좋았던 시절, 가슴에 하나하나 심어 준 꿈이 싹트기 시작해서 좋았던 행복한 기억이다.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에 선생님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나이에 새마을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책 한 권 읽지 않고 청년기가 흘러가도 누구하나 “책이라도 좀 읽어야지” 하는 어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생각이 트인 어른들의 자녀들은 참으로 다행이다. 굶기를 사흘에 한 번씩 반복해도 자식들을 중학교에 보내고 고등학교에 보내고…. 때문에 그들은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과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돌이켜 원망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말씀처럼 가르치고 싶어도 워낙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울먹이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외면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다만, 옛날 어느 고을에 일자무식으로 살아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동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정말 무서운 전설처럼 전해지는 다큐멘터리임에 틀림없다. 
  
  정말 당연하지 않은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이 가슴이 터지도록 돌이킬 수 없는 업으로 남아 생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게…. 
  
  지금도 가슴을 슬프게 한다.
  
  1-1 
  갑자기 공장안이 술렁인다. 
  
  “얘들아, 있잖아. 재건중학교에 야학선생님이 새로 오셨대. 선생님이 없어서 학교가 폐교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글쎄말이지 서울에서 선생님이 새로 오셨단다.” 라는 이야기를 소녀는 얼핏 듣게 된다. 
  
  작년부터 가고 싶어도 야간반이 없어서 못 갔는데 야학선생님이 오셨다니…. 
  
  소녀는 귀가 번쩍 뜨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마나 가고 싶었던 학교였는데…. 
  
  얼마나 되고 싶었던 학생이었는데…. 
  
  그래서 소녀는 같은 또래 친구들에게 함께 공부하기를 권했지만 일하고 공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각자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고 했다. 
  
  함께 공부하고 싶은데…. 
  
  하지만 며칠 동안 설득 끝에 두 친구가 함께 하기로 하고 다음날 우리 셋은 야학을 찾아갔다. 
  
  학교엔 주간학교를 막 졸업한 친구들도 몇 명 있고, 암튼 함께 공부할 친구들이 많을수록 기분은 좋았다. 
  
  선생님의 모습은 머리는 곱슬머리, 키는 작지만 당차고 카리스마가 있어 보였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공장에서 밤늦도록 일만 하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집합을 가르치고…. 
  
  꿈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견딜 수 없이 힘들면 아침에 대문 나설 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이 오늘로 끝난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냐”고 의지와 견딤을 가르치신 그는 스무 살 청년, 야학교사였다. 
  
  2. 
  옛날 어느 시골마을에 야학교사로 왔던 그 아름다운 청년을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온라인에서 만났다. 
  
  반백이 다 되어 그분과 통화를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설렘 또한 크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고 묻는 그분의 첫마디에 목이 메었다.
  
  그 반가움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까.
  
  어법에 어긋나도 좋다. 정말 너무너무 반가웠으니, 어순이 조금 틀리는 게 대수냐. 어쩌면 첫사랑을 만나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다. 
  
  그 아름다웠던 스무 살 청년, 당신으로 인하여 학문에 뜻을 두었고 늦게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 청년은 삶의 끈을 찾아 준 사람. 
  
  그래서 시작한 공부.
  
  이제는 안개가 걷힌 듯, 구름을 벗어난 별인 듯, 상큼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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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녕 봄은 올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기 두 시간 전.
  
  동두천에서 강남까지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30년 전의 야학교사로 우리 마을에 왔던 젊은 청년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정말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시골 소녀들에게 그 청년은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던 사람이다.
  
  공장 일을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면 피곤하지만 책을 챙기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기쁨을 준 것만으로도 희망을 만들고 꿈을 만들어 주셨던 분이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이 꿈결 같고, 30년을 한순간에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의 저편에는 스무살의 청년이 불러 주던 ‘가고파’라는 가곡이 뇌리에 스치며 그리움으로 반추된다. 
  
  졸음이 몰려 오는 저녁 어느 수업 시간.
  
  공장일이 바빠서 책임량을 다하기 위해 화장실도 못 가고 무리하게 스웨터 짜는 기계에 매달려 일했더니 아무래도 곤했던 모양이다.
  
  흑판 앞에서의 선생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올 쯤, “내 고향 남쪽바~~바다 그 파란 무~~을 눈에 보이네…” 목련화 등 그런 선생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피로에 지친 학생들의 잠을 깨워 주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어렵고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려고 하는 노력이니 최선에 가깝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오늘의 견딤은 내일 희망의 주춧돌이 될 거라고…. 누누이 일러 주시던 선생님이셨다.
  
  어느 비오는 저녁이었다.
  
  내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학교까지 오셨는데 어머니의 그 남루함을 선생님이 보실까봐 “누가 우산 갖다 달랬냐”고 소리치며 어머니를 쫓듯이 돌려보내고 다시 교실에 들어온 나에게, 현재 처한 상황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니 부디 자신의 삶에 충실해 줄 것을…. 그래서 좋은 습관으로 성실하게 삶을 채워야 한다고 깊은 메시지를 남겨 주셨던 분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가슴에 울림으로 남은, 귀에 들려 올 것만 같은 “오늘을 내 최후의 날로 생각하라” 즉, 그 말뜻은 내가 정말 오늘 죽는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가난하면 어떻고 누구에게 언짢은 말을 들은들 어떠냐고, 내 최후의 날인데 조금의 후회라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최선을 다한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20살 청년이 어떻게 그런 보석 같은 말만 골라서 했는지. 그분의 격이나 됨됨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루하게 겨울은 매섭고 추웠다. 
  
  그리고 느지막이 찾아온 봄. 
  
  아직은 봄바람이 고운 햇살의 비춤을 시샘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정녕, 봄은 올 것이다.⊙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최병학님이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 
 

꽁까이의 보은


  오래전 젊은 날의 옛일이 떠올라 답글을 올립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병역의무를 필하려고 해병대 초급장교로 지원 입대하여 ‘베트남’전에 참전하였습니다.
  
  전투부대 소총소대장으로 수개월째 소대원들을 이끌고 생사의 고비를 넘던 중, 월남전 중 가장 치열했던 68년도 구정 공세날 새벽녘~ 위험에 처한 청룡부대 제10중대를 구출하라는 임무를 받고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중대장을 잃어 가며)임무를 완수하고 귀환 도중…. 폐허가 된 마을을 지나면서, 기둥에 목줄이 매여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은 빈사상태의 개 한 마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령 ‘유재호’ 상병에게 개줄을 풀어 데려갈 것을 명하니, 마침 옆에 있던 선임하사 ‘천철수’ 중사가 말리길 “소대장님예… 살지도 몬할낀데 모할라꼬 쌩고생할랍니껴?” 제가 답하기를 “살릴 때까지다! …데려가자!” 귀하게 아끼던 수통물을 그놈 입가에 대고 벌컥대며 먹이고, 씨레이션, 전투식량을 까 먹이며 귀대하였습니다.
  
  하루하루 원기를 회복한 ‘꽁까이’(소대원들이 붙여준 개이름)는 어느덧 튼실하게 잘 자라 주었고, 우리 수색중대의 ‘마스코트’로 성장하여 주인을 알아보듯 고마운 표정으로 항상 제 곁을 맴돌며 자나 깨나 저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있던 약혼녀의 편지에 ‘꽁까이에게 너무 마음 뺏기지 말라’는 경고도 수차례 받곤 하였답니다.
  
  그런 ‘꽁까이’와의 밀월도 몇 달~. 이제 소대장 임기도 거의 끝날 무렵인 어느 날…. 치열한 공격명령이 하달된 전투에서 마지막 고지탈환의 돌격선에, 철벽 같은 ‘베트콩’의 철조망과 지뢰밭에 봉착, 전소대원이 소낙비 적탄 속의 몰살 위기에…. 저 지뢰밭 속에 단 한 발만이라도 폭파되면, 그 길로 돌격돌파가 가능할 텐데…. 오직 그 생각뿐인 소대장의 간절한 소망…. 그렇다고 부하를 그 속에 뛰어들게 할 수도 없는 소대장의 아픈 마음…. 결국 이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소대장이 뛰어들어 부하들을 살릴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 적탄은 빗발치고…. 여기저기 소대원의 비명소리…. 약혼녀와 부모님의 얼굴도 잠시…. “얍 !!!…. 부하들의 목숨을 위해…. 이 한몸을…!”
  
  벌떡 일어나 지뢰밭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나의 방탄조끼 밑에 겁먹고 쭈그려 있던 ‘꽁까이’가 어느새 앞질러 뛰어 들어가, 어느 지점의 지뢰를 폭발시켜 주인 대신 처절히 산화하였고, 그와 동시에 전 소대원이 함성를 지르며 공격을 개시하여 고지를 점령하였던 그날이…. ‘항상 친애하는 박시호 동지의 행복편지’를 열어 본 오늘 아침…,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40여년 전 옛일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스물여섯의 꽃다운 나이였습니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노산 선생의 어록에서…. 꿈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베트남어로 ‘귀여운 아가씨’를 지칭하는 ‘껀까이’를. 한국군 사병들은 편한 발음으로 ‘꽁까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우리 부대의 마스코트 충견 ‘꽁까이’가 소대장 대신 장렬히 산화하기 한 달쯤 전인가…. 청룡부대의 ‘용궁작전’에 투입, ‘호이안’ 외곽지역을 수색하던 중… 베트콩 정규군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역포위를 당하게 되어, 적군의 필사적 공세로 아군의 보급지원이 끊긴 채 40여 명의 소대원들과 함께 사흘째 굶으며 철벽 같은 포위망 속에 고립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실탄, 탄약은 물론 식수, 전투식량(씨레이션)까지도 고갈된 지 나흘째. 전투원의 투지도 한계를 벗어난 듯 소대장과 선임하사를 비롯하여 전소대원이 섭씨 40도를 웃도는 열대의 뙤약볕에 언제 공격을 시도할지 모르는 불안과 초조…. 사흘을 꼬박 새우며 불면, 그리고 허기지고 목마른 고통의 나흘은 지옥의 문턱을 연상케 하였습니다. 주변 전투상황이 여의치 못해 공중지원도 불가능하고, 주변엔 적의 독극물 투여로 식수도 구하기 어려운 극한상황에서 소대장의 책임감도 (소대원들을 살려야겠다는 절박감으로) 절실한 마음이었습니다.
  
  소대원들은 진지에 흩어져 정글 곳곳을 뒤지며, 혹 요깃거리를 찾곤 하던 중…, 1분대장 ‘박인화’ 하사가 개울가에서 어미 잃은 주먹만 한 새끼오리 십여 마리를 잡아 와, 철모에 물을 담아 삶는 냄새는 잠시 우리들 모두가 행복을 만끽할 만큼 구수하였답니다. … 즉석 요리로 둘러앉은 3명의 분대장과 선임하사관, 그리고 위생하사와 소대장 …. 이렇게 허겁지겁 집어 든 순간 소대장의 눈엔, 멀찌감치에서(안 보는 척) 우리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소대원들이 마음에 걸려… 즉시 중단시켜, 철모 속의 한 움큼도 안되는 그것들을 소대원들이 보는 가운데 맨땅에 쏟아 부을 때, 깜짝 놀란 분대장들에게 “소대원들과 함께 고통을 참아 내자!”고 달래며 시종 코끝을 킁킁대며 주변을 돌던, 허기진 ‘꽁까이’에게 먹게 하였습니다.
  
  ‘꽁까이’ 역시도 주인의 마음을 읽었던지 끝끝내 먹지를 않았습니다.
  
  ‘소대장은 언제나 소대원들과 고락을 함께하며, 독수리의 공격에서 목숨 걸고 병아리를 품어 살려야 한다는 전술교관 ‘라스패기’ 소령의 명언으로 극적인 전투상황을 돌파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김무일님이 보내 주신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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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동시킨 일본인 며느리

마음 속 깊이 감동을 느낀 지 가 얼마나 되었는지요? 아니면 남에게 진한 감동을 준 적은 언제였는지요? 감동을 많이 느끼거나 감동을 많이 주는 일이 행복한 일인데 그런 일들을 많이 만드는 하루 만듭시다. 행복하세요. https://yout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