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1.

월간조선 4월호 - 박시호의 행복편지


박시호의 행복편지

33세 주부편지 / 행복 부부 편지 / 장미꽃 한 송이의 사랑 / 아내의 위암

박시호    사진박한나 Illustrator  
·         설명: http://monthly.chosun.com/images/ic_line_01.gif
박시호 happyletter.park@gmail.com
57.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동국대 법무대학원 문화예술관련법 석사 과정.
⊙ 재무부장관 비서관,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http://sihopark.com.ne.kr twitter@parksiho

박한나 parkreative@gmail.com
⊙ 홍익대 국제디자인박사 디자인학 과정(휴학).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석사(Illustration 전공).
⊙ 前 제일기획 아트 디렉터.
⊙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작가 활동 중.

  
33세 주부편지


 
안녕하세요. 서른세 살 먹은 주부예요.  서른두 살에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고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 누가 좋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 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는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 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 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 거는 하자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 좀 들어달라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남편이 어릴 적 엄청 개구쟁이였대요.
 
매일 사고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러 다니셨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어릴 때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가던 트럭에 받힐 뻔한 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 못 쓰신대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막노동이었는데… 남편은 군 제대하고도 스물여섯 살 때쯤까지 놀고먹었다 합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예요.
 
남편은 서른세 살이고요. 60세 넘었을 때도 막노동하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막노동을 오래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이 쩍쩍 갈라져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한다고 하더라고요.
 
평생 모아온 재산으로 마련한 조그마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할 때 집 장만해 준다고 팔고…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고요… 저희요. 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 버는데 한 달에 150만원 정도 벌어 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 써야 하고 여러 가지로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 박았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고요. 어떡합니까. 저렇게까지 남편이 말하는데…
 
그래서 넉 달 전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왔습니다처음엔 아버님이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하시더라고요늙은이 가봐야 짐만 되고 눈치 보인다면서요남편이 우겨서 모셔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 써서 정성껏 차려드리면… 그걸 드시면서 엄청 미안해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 거 해드리면 안 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고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러 드시지도 않고요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는 것 보고 놀라서 걸레 뺏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하시더라고요.
 
식사 후면 바로 들고 가서 설거지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 말라고 몇 번 말씀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 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 이 못난 며느리 눈치 보이니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 압니다. 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 쓰고 모아두었다가 제 용돈 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 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한 달 전쯤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때쯤 들어오시더라고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 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올게 하곤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오다가 이 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 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 그래요. 아버님이 아들 집에 살면서 돈 한 푼 못 버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면서 돈 버셨더라고요.
    
그 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안 보이더라고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을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 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 좋은지 아버님 찾으러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 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며칠 전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 온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 봐도 되는데 그게 불편하셨던지 아들 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고 눈치만 보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계셨다니… 친정의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날따라 아버님 웃을 때 얼굴의 많은 주름과 손목의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 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오더라고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면서 뒤에 끌고 오던 유모차를 숨기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 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하다며 손 꼭 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나 때문에 미안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진 손등과 굳은살, 베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 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 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낸 후 셋이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점퍼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고맙다면서 받으시더라고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하실까 봐 케이블TV도 신청했고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하시는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드리는데…
 
보기보다 정말 왜소하시더라고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질 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평생 헌신하면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다고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처럼 생각하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 거라고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 보셔도 돼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잖아요.
 
아버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 거예요.
 
저 아버님 싫어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 돼요.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렇게 일 안 하셔도 돼요…
 
저 허리띠 짧게 매고 알뜰하게 살게요…
 
사랑해요 아버님.

  
※ 이 편지는 행복편지 가족 이옥현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행복 부부 편지

 
어제는 제 집사람을 만난 지 꼭 2년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생일이다, 결혼기념일이다, 기념일도 많은데 처음 만난 날까지 챙기느냐고 힐난하실지 모르지만, 사실 부부라는 인연의 매듭이 처음 생겨난 날은 바로 첫 만남의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저에게는 그날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2년 전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마침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가을 전시회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저는 미지의 여인에 대한 동경보다는 미술 감상의 실속이나 챙기자는 생각에서 미술관을 첫 만남의 장소로 제안하였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집사람은 한국미술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고 처음 만나는 장소로 미술관을 제안한 사실에 조금은 당황했다고 하더군요.

 
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서부터 간송미술관까지 15분 정도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참 꾸밈없이 순수한 사람이란 걸 느꼈고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미술관에서 길가로 바로 나오면 ‘피오나’라고 하는 괜찮은 레스토랑이 하나 있는데 그날 마침 문을 닫았는지 아니면 집사람이 사양을 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날 저녁은 ‘성북동 돈가스’에서 돈가스를 먹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어쩌면 제가 한번 마음을 떠보느라고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맛있게 돈가스를 먹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며 참 흐뭇했고 한편으로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후로도 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 있는 집보다는 허름하더라도 맛있다고 하는 식당들을 많이 찾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번 집사람이 지나가는 말처럼 자신이 맛있어 한다고 소박한 음식만 사 주면 안 된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좋은 레스토랑에 가자고 해도 집사람은 평소처럼 소박한 메뉴를 먹자며 거절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저는 그 얘기를 한편으로는 기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망각하면서 그렇게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집사람과 아마 결혼해서는 처음으로 언쟁에 가까운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한랭전선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름 잘 봉합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뭔가 좀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계기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집사람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여보, 우리 행복하게 잘 살아요…” 사실 저희 사이에 ‘여보’라는 말은 구어체가 아닌 문자상 호칭으로만 하는 말이지만, 저는 이 호칭을 참 좋아합니다.

 
아무튼 그 메시지를 받는 순간 2년 전 처음 집사람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첫 만남의 설렘도 느껴졌습니다. 그때 생각난 게 행복편지에서 전에 몇 번 소개했던 추천 레스토랑 편지였고, 그중 저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63빌딩 WALKING ON THE CLOUD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집사람한테는 다른 말 없이 저녁 먼저 먹지 말고 기다리라고만 하고서 저녁 7시에 대방역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집사람은 그냥 동네 근처에서 외식하나보다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속으로 괜히 비싼 데 간다고 핀잔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곳에 도착하여 서울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식탁에 자리 잡는 순간 집사람의 눈빛은 더욱 초롱초롱해진 것 같았고 입가에 맴도는 미소도 그날따라 더욱 화사해 보였습니다. 식사도 괜찮은 편이었고 직원들의 서비스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내년 이맘때 한번 더 올까 했더니, 그럼 그동안은 이런 데 안 올 거냐고 따지듯이 대꾸하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일상생활에 묻혀 분위기 한번 내보지 못했구나 하는 아쉬움이 조금은 들기도 했습니다. 돈가스나 감자탕을 맛있게 먹는 집사람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던 저였지만, 스카이라운지에서 만족해하던 집사람의 모습도 저에게는 또 하나의 행복이었습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소박함과 우아함을 모두 갖춘 집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 또한 그에 어울리는 멋진 남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하루였습니다.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송진호님의 글이었습니다.
 



장미꽃 한 송이의 사랑


  저는 서울에서도 달동네라고 불리는, 조금은 어려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갈 때면 늘 택시기사 아저씨들의 볼멘소리를 듣게 되지요. 골목도 많고 지대도 높을 뿐만 아니라 통행하는 사람도 많아 운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누구는 이런 곳에 살고 싶어 사나요? 저도 좋은 지역에서 도로포장이 잘 되어 있어 차량 통행하기 좋고 사람도 별로 안 다니는 곳에서 살면 좋겠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살고 있는데, 그래도 이 동네는 정이 살아 있는데 아마 운전하시는 분들은 모르실 겁니다. 아무튼 오늘은 모처럼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이럴 때 제가 먼저 하는 일이 무언지 아세요? 택시기사들의 눈치를 살피는 일입니다. 동네 이야기만 꺼내면 눈치들이 별로 안 좋으니까 기분을 어떻게든 맞춰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말도 걸고 기분도 풀어주곤 합니다. 그러면서 늘 왜 내가 눈치까지 보면서 택시를 타야 하는지 스스로 어이없어 하곤 합니다.

 
오늘은 택시를 타자마자 휴대폰 벨이 울려 급히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사아저씨가 듣고 있던 라디오 볼륨을 줄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라디오 소리는 운전기사 마음대로 아닙니까? 손님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방송을 크게 틀어 어떤 때는 짜증이 나고 때에 따라서는 말싸움까지 벌이는 경우도 많은데 오늘의 기사아저씨는 저를 배려하기 위해 볼륨을 줄인 것이지요. 저는 처음으로 남을 배려하는 기사아저씨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동안 만났던 택시기사 아저씨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는 순간이었지요. 너무나 감사하였고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덕분에 통화 잘하게 되었고, 통화를 끝낸 후에 이런저런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사아저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그마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면서 나름 돈도 많이 벌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정도로 재산도 모아 가족과 재미있게 살았다고 합니다.


  
퇴직 후 마누라와 함께한 생활

 
그런데 경기가 어려워지고 종업원들과의 골치 아픈 사건 등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서 결국 회사를 정리하고 그냥 집에서 쉬기로 결정하였답니다. 처음에는 마누라를 비롯하여 식구들도 다 반겼답니다. 본인도 처음 맞는 달콤한 인생의 휴식기간이 너무 좋았고, 왜 그동안 이렇게 편한 생활을 모르고 회사 경영 한다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며 거래처와 관공서에 굽실대면서 회사에서는 노조와 다투어가며 회사 하나 운영한다고 그 고생을 하며 살았는지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런데 두세 달이 지나면서 마누라와 마찰이 시작되었답니다. 함께 붙어 있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이 있다 보니 서로 잔소리만 많아지고 왜 그렇게 흉이 많이 보이는지 서로가 불편해지니까 어떠한 핑계라도 만들어 집을 빨리 비우는 것이 서로가 편해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누라는 그동안 늘 집에서 생활해서 그런지 이런저런 일들을 만들어서 친구도 만나러 가고 시장도 보러 가고 하루종일 무언가 생활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막상 자신은 산에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산에 같이 갈 사람 만드는 것도 어렵고, 그리고 산이라는 것도 건강을 위해 매일 간다지만 특별히 아프지도 않고 불편한 일도 없는데 왜 그렇게 매일 가야 하는지 그것도 고역이더랍니다. 운동선수들이 운동 좋아한다고 쉬는 시간에도 운동할까요? 취미로 운동하면 좋지만 직업으로 운동하면 너무 싫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로 그런 입장이 된 것이지요. 골프도 마찬가지로 같이 칠 수 있는 사람이 매일 어디 있겠습니까? 돈이 있으면 건강이 안 좋거나 시간이 없고, 건강하면 돈이나 시간이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인데… 골프라는 것이 시간없을 때 억지로 시간 만들어서 가야 재미있는 것이지,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 수 있으면 재미없는 것이지요. 그러니 생활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했겠습니까? 무료한 날들만 많아지니, 어떡해서든지 친구들과 만날 궁리만 하고, 만나서는 할 일이 없으니 쓸데없는 잡담으로 소일하고, 마지막에는 술 한 잔 먹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이것 바쁘게 살던 사람이 한가하게 이렇게 산다는 것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누라랑은 늘 붙어 있으니까 왜 그렇게 보기 싫은 모습들이 많아지는지, 그러니 매일 다투기만 하고 그러다 보니 부부관계는 엉망이 되었답니다. 그동안 우리가 진실로 사랑해서 산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결국 부부관계는 더 악화되어 이혼 직전까지 가게 되었답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이 서로에게 짜증 되고 집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답니다. 여자란 역시 남자가 돈을 많이 벌어주어야만 하지 이렇게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살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구나. 그런데 지금까지 결혼하여 함께한 기간이 40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누구 때문에 잘 먹고, 잘살고, 좋은 옷 입고 살았는데 이젠 돈을 못 번다고 이혼을 하자고? 그래서 외국에서는 퇴직하자마자 황혼이혼이라는 것이 있구나. 그동안의 삶은 내가 좋아서 산 것이 아니고 내 돈이 좋아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마누라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답니다. 당연히 대화는 줄어들고 대화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말다툼으로 끝나게 되어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얼떨결에 산 장미꽃 버릴 수도 없고…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술을 먹고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는데 술집 근처에 장미꽃을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답니다. 그 아주머니가 자꾸 쫓아오며 꽃을 사달라고 해서 술김에 한 송이를 사게 되었답니다. 하도 귀찮게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사기는 하였는데 버릴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집으로 가지고 가게 되었답니다. 초인종을 누르니 마누라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문을 열어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손에 들려 있는 장미를 본 것이지요. 갑자기 발길을 멈추고 물끄러미 다시 한 번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장미 왜 사왔어?”하는 소리에 깜짝 놀랐답니다. 장미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당신 주려고 사왔지” 무심결에 한 얘기지만 갑자기 마누라가 감동을 받더랍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잡히고 이런저런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그동안 잘못했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결국 부인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더랍니다. 그러면서 부인은 “그동안 너무 미안했었다고… 왜 그렇게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두 사람은 서로 순간 당황했지만… 결국 장미꽃 한 송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복원해 준 것이지요. 사실은 아무 의미 없이 장미꽃을 사게 되었고 버릴 수 없어서 가져왔지만 그 장미꽃이 결국은 두 사람의 사랑을 다시 연결해 준 것이지요. 그는 마누라에게 장미꽃을 주면서 아무 말 없이 꼭 껴안아주었답니다. 사실 할 얘기도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마누라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미안한 마음도 많아 흐르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더랍니다. 그 이후 그는 부인과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앞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답니다. 그날 이후 그가 결심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택시 운전이랍니다. 그래서 그는 집안 식구들 몰래 택시 운전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택시 회사를 찾아가서 사장님과 면담을 하였답니다. 사장님은 깜짝 놀라면서 “잘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며 “자존심 상하고, 식사 제때에 할 수 없고, 나이 먹은 사람이 하루종일 좁은 차 속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줄 아느냐?”면서 여러 번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였지만 결심이 확고한 그분의 모습에 결국 열심히 해보라면서 흔쾌히 열쇠를 내주었답니다.


  
이제 나도 돈을 받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

 
그는 이야기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 사장님은 나에게 은인입니다. 돈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고, 행복을 알게 해주었지요. 그동안 살면서 모두들 나에게 돈을 달라고만 했지 나에게 돈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회사 직원들도 그렇고, 식구들도 그렇고 나는 돈을 주는 사람이고 그들은 돈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사람이 나에게 돈을 주는데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저는 돈을 주는 손님들에게 늘 감사하다는 인사를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분들이라고요.” 그러면서 그는 “저는 매일 마누라에게 2만원씩 용돈을 줍니다. 손자 손녀에게도 수시로 용돈을 주고 선물도 사주고 있습니다. 내가 일을 마치고 새벽에 들어가면 마누라는 기다리고 있다가 온갖 맛있는 것을 다 해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늘 다툼만 있었는데 지금은 다툼은커녕 행복한 대화만 있을 뿐입니다.” 또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저는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있는 돈만 쓰고 남은 인생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너무 답답하고, 시간 보내기 힘들고, 식구들과 마찰만 생기고… 그런데 지금은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수많은 손님과 대화도 하고… 너무 행복하지요.” 그러면서 그는 운전하면서의 철칙을 하나 세웠답니다. “손님들에게 절대로 먼저 말을 걸지 말자… 손님들도 지금 이 순간이 다 중요한 시간인데… 쉬고 싶은 사람, 잠을 자고 싶은 사람, 무언가 골똘히 고민하고 싶은 사람, 대화를 하고 싶은 사람… 그들을 배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은 생각지도 않고 내가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정치가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대통령이 어떻고… 제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들에게 열변을 토합니까? 저는 손님들이 먼저 말을 걸어오면 대답을 하면서 대화를 계속해야 할 분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대화를 한답니다. 제 차를 타고 차에서 내리면서 잔돈을 팁으로 주고 가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그런 것에…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저는 그동안 행복은 저 멀리 있고, 많은 돈에서 나오고, 많이 배우고, 권력과 힘이 있어야만 행복한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행복은 사소한 곳에서, 작고 조용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샘솟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손님 중에는 돈도 많고 많이 배운 것 같은 사람들이 더 불행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마음 급하고, 성질 참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행복합니다. 회사를 운영할 때보다 비록 적은 돈이지만 매일 마누라에게 2만원씩의 용돈을 준다는 기쁨 얼마나 큰 줄 아십니까? 마누라도 너무 행복해 합니다. 새벽까지 남편을 기다리며 남편의 안녕을 위해 기도해 주는 마누라가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운전을 하면서 생각 하나를 바꾸니 세상이 바뀌었고, 행복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도 제 차를 타주신 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너무나 귀한 분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달동네에 살고 있는 것도 싫었고, 가난하게 사는 것도 싫었고, 나라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싫었는데 이렇게 사시는 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차에서 내리기가 싫었습니다. 마냥 대화하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습니다. ‘행복하게 사세요. 행복 많이 만드세요.’ 저는 차에서 내리면서 왜 갑자기 내가 행복해졌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행복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 이 글은 행복편지 가족 윤경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아내의 위암


 
저는 1997년 가을 뒤늦게 결혼하여 1999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습니다. 당시 아내는 서울의 모 시중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저는 대우그룹 관련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대우사태와 함께 2001년에 제가 근무하고 있던 회사가 다른 회사로 인수되어 결국 회사를 떠나 지금 근무하고 있는 직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 속에서 2002 8월 둘째 딸을 출산하였는데 이때 아내의 몸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암이었습니다. 그동안 암이라고 하는 것은 남의 일이었고 먼 주변에서조차 경험하지 못했기에 사형선고라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나 큰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험난한 고통을 주셨는지… 그동안 우리 부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병이 생기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남에게 잘못한 일도 없고 세상에 죄를 저지른 것도 없는데 왜 나의 아내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고 우리 가족에게 해결할 수 없는 불행을 주시는지… 나의 아내가 암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부부에게는 처음으로 당하는 엄청난 일이라서 도저히 감당해 낼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수술을 하게 되었고 수술 중에 보호자를 호출하여 갔더니 진행성 위암이라 국부 절제가 아닌 전부 절제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눈물만이 흘러내릴 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했습니다. 내가 침착하고 중심을 잡아야지 아내를 살리고 우리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정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 보잘 것 없게 생긴 흡혈박쥐가 살고 있는데 이 작은 체구의 흡혈박쥐가 바로 야생마의 천적이라는 것입니다. 흡혈박쥐는 야생마를 공격할 때, 항상 야생마의 다리 위에 달라붙어서 날카로운 이빨로 재빠르게 야생마의 다리를 물고 뾰족한 입으로 피를 빨아먹는데 야생마가 아무리 날뛰어도 이 흡혈박쥐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흡혈박쥐는 배가 부를 때까지 피를 빨아먹고 난 뒤에야 야생마에게서 떨어져 자기가 쉴 곳으로 날아가 는데 문제는 흡혈박쥐에게 물린 야생마는 피를 흘리면서 미쳐 날뛰다가 결국에는 죽게 되는데, 동물학자들에 의하면 흡혈박쥐가 빨아들인 야생마의 피의 양은 야생마를 죽음으로 몰아넣기에는 너무 적은 양이라서 야생마에게 문제가 될 정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야생마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포감을 이기지 못하고 격분한 성질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18세기 프랑스의 바스티유 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단두대 앞에 끌려나온 사형수의 목에 작은 얼음조각 하나를 떨어뜨렸더니 사형수가 이내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해 보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기 암 판정을 받았지만 특별한 치료 없이 병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여생을 준비하며 자신의 병에 대해 연연하기보다는 남은 인생과 오늘에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가려 애쓰는 것입니다. 죽음의 가장 큰 원인은 삶에 대한 좌절과 포기라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아내를 살려달라는 간곡한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다행히 아내는 수술결과가 좋았고 퇴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 아내가 저에게 통장정리며, 집안일이며, 아이들에 관한 보살핌 등 이것저것 말을 해주는 데 이는 마치 유언 같아 너무 기가 막혀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엉엉 울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동안 아내에게 그리고 가장으로서 성실하지 못했던 기억들만 가슴을 때리면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더군요.

 
다행히 아내는 항암치료도 잘 견디고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받으면서 현재 만 4년이 지났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에 건강한 사람과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장기로 전이되거나 재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5년 동안 6개월마다 정기검진을 한 후 이상이 없으면 다음 5년간은 1년에 한번 정도씩 정기검진을 하고 그 후 이상이 없으면 건강한 사람과 같이 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내에 대한 큰일을 겪으면서 마음이 아프고 상처가 나 본능적으로 가족보호 외에는 마음을 넉넉하게 갖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박시호님을 만나게 되었고 ‘행복편지’를 받게 되면서 좀 더 세상에 대한 감사와 행복에 대해 느끼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받아 보는 ‘행복편지’ 속에는 가난 속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부부 이야기라든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자식들의 이야기, 고부간의 갈등을 슬기롭게 헤쳐나간 이야기 등 우리 사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에 보내주신 ‘행복 부부 편지(63빌딩 레스토랑 편)’를 받고 반성 많이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내에게 집에서 남편 잘 챙겨주고 순종적인 역할만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이렇게 큰 고통의 시간들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 등… 참으로 반성 많이 하고 정말 아내에게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저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다시 느끼게 되었고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폐쇄적인 삶을 활짝 열고 나누고 베풀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그리고 주변에서 아픔을 느끼고 사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봉사하고 후원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해성사하듯 하소연하기는 처음입니다. 왠지 하고 싶어서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하고 한결 마음이 넉넉해지고 행복해집니다. 지금은 우리 부부 편안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전보다 더 깊은 사랑을 하게 되었고, 저 또한 아내와 가족에 대한 관심과 애정 더 많아졌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비록 어렵고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더욱 사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행복편지’ 덕분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좋은 내용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전해주는 행복전도사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행복편지 가족 모두에게 ‘행복편지’가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내용은 행복편지 가족 김철이님의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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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동시킨 일본인 며느리

마음 속 깊이 감동을 느낀 지 가 얼마나 되었는지요? 아니면 남에게 진한 감동을 준 적은 언제였는지요? 감동을 많이 느끼거나 감동을 많이 주는 일이 행복한 일인데 그런 일들을 많이 만드는 하루 만듭시다. 행복하세요. https://yout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