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이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느낄 수 있기에 감히 옮기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가 어려웠던 시절, 제가 어찌어찌하다가 강원도 인제군 남면에 있는 새마을청소년학교에서 야학 교사를 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이야 길도 좋아지고 교통도 좋아졌지만 강원도 내설악의 산골이었지요. 더구나 보수를 지급하지 못하니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구할 수 없어 문을 닫게 될 처지에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선생은 달랑 저 하나. 그러니 국어, 영어, 수학은 물론이고 음악, 미술, 체육, 가정, 심지어는 가정실습까지 가르쳤습니다.
정규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을 주간부과 야간부로 나누어 전 과목을 혼자 올라운드 플레이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학습이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주간부 아이들 중에는 산길을 두 시간 걸어서 학교에 오는 친구도 있었으니, 학교를 오가는 시간만 왕복 4시간이 걸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야간학부를 만들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새마을공장이 있어서 나이 스물 전후의 배움을 갈망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1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왔습니다. 입학원서를 받고 개학식을 하고….
야간부 학생들은 온종일 새마을공장에서 일을 마치면 우물에서 물 길어다 밥까지 해 먹고 수업에 옵니다. 아무리 배움이 좋다고 하지만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수업을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학생들이 늘어납니다. 학생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제가 좋아하는 가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조그맣게 하면 자장가가 될 테니 큰 소리로 목청껏 불렀지요.
그 시절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워낙 깊은 산골이라 통금 단속을 걱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커피를 끓여 나눠 마시며 잠을 깨우고, 커피가 떨어지면 설탕물을 나눠 마시며 공부했습니다.
봄이면 산나물을 뜯으러 나가고, 소양강 끝줄기로 천렵을 나가는 것이 자연학습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교무실로 찾아왔습니다. 수줍은 모습을 하며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자신이 이 학교에 올 때는 ‘단지 신문이라도 잘 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야학에 왔는데 이제 자신을 꿈을 가지게 됐다고. 앞으로 꼭 대학에 가겠다고….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징집영장을 받고 군대를 가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고 어느새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습니다.
올해 3월, 화가인 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 옛날에 강원도에서 야학선생님 한 적이 있느냐”고. 그러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저를 찾는 사연이 올라와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찾은 제자가 아래의 글을 쓴 사람입니다.
..................................................
1958년생, 우리 나이로 오십하고도 세 살이지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딸은 이미 출가까지 시킨 엄마이자, 농사를 지으며 올해 서울에 소재한 대학교 사회복지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그때 그 시절 꿈을 가지라는 이야기를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며 검정고시로, 끝내는 딸아이 출가시키고 제가 대학생이 되었답니다.
동두천에 살면서 낮에는 제법 큰 농사를 지으며 오후에는 공부를 하고, 틈틈이 시를 써서 여러 곳에서 상도 많이 받았답니다.
..................................................
30여 년이 지나 그 제자를 저희 한의원에서 만났습니다.
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그 제자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만든 참기름과 된장을 가지고 동두천에서 달려왔습니다.
며칠 전, 스승의 날에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세상에 눈을 뜨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선생님은 제게 가장 귀한 분입니다.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고맙습니다. 멋진 날 되세요. 최** ”
비록 저는 그 제자처럼 열심히 살진 못했지만, 이런 멋진 제자를 둔 저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아니 저는 그 옛날 수학공식 몇 개, 영어단어 몇 개를 가르쳤지만 오히려 그 사람이 제 인생의 스승이겠지요.
제자의 블로그에 올려진 2편의 글을 옮깁니다.
하나는 30년이 흘러 저와 전화통화를 한 이후 올린 글이고, 또 다른 한편은 저를 만나는 날 쓴 글입니다.
..................................................
즐거운 날의 꿈
1.
가슴 저 끝에 있던 어린 날의 기억이 보석처럼 되살아났다.
가난했지만 꿈이 있어 좋았던 시절, 가슴에 하나하나 심어 준 꿈이 싹트기 시작해서 좋았던 행복한 기억이다.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에 선생님은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학교에서 공부해야 할 나이에 새마을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고, 책 한 권 읽지 않고 청년기가 흘러가도 누구하나 “책이라도 좀 읽어야지” 하는 어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나마 생각이 트인 어른들의 자녀들은 참으로 다행이다. 굶기를 사흘에 한 번씩 반복해도 자식들을 중학교에 보내고 고등학교에 보내고…. 때문에 그들은 가슴을 쥐어짜는 아픔과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돌이켜 원망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말씀처럼 가르치고 싶어도 워낙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울먹이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외면할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다만, 옛날 어느 고을에 일자무식으로 살아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동네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정말 무서운 전설처럼 전해지는 다큐멘터리임에 틀림없다.
정말 당연하지 않은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이 가슴이 터지도록 돌이킬 수 없는 업으로 남아 생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게….
지금도 가슴을 슬프게 한다.
1-1
갑자기 공장안이 술렁인다.
“얘들아, 있잖아. 재건중학교에 야학선생님이 새로 오셨대. 선생님이 없어서 학교가 폐교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글쎄말이지 서울에서 선생님이 새로 오셨단다.” 라는 이야기를 소녀는 얼핏 듣게 된다.
작년부터 가고 싶어도 야간반이 없어서 못 갔는데 야학선생님이 오셨다니….
소녀는 귀가 번쩍 뜨인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마나 가고 싶었던 학교였는데….
얼마나 되고 싶었던 학생이었는데….
그래서 소녀는 같은 또래 친구들에게 함께 공부하기를 권했지만 일하고 공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냐며 각자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고 했다.
함께 공부하고 싶은데….
하지만 며칠 동안 설득 끝에 두 친구가 함께 하기로 하고 다음날 우리 셋은 야학을 찾아갔다.
학교엔 주간학교를 막 졸업한 친구들도 몇 명 있고, 암튼 함께 공부할 친구들이 많을수록 기분은 좋았다.
선생님의 모습은 머리는 곱슬머리, 키는 작지만 당차고 카리스마가 있어 보였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공장에서 밤늦도록 일만 하던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집합을 가르치고….
꿈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견딜 수 없이 힘들면 아침에 대문 나설 때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이 오늘로 끝난다면 무엇인들 못하겠냐”고 의지와 견딤을 가르치신 그는 스무 살 청년, 야학교사였다.
2.
옛날 어느 시골마을에 야학교사로 왔던 그 아름다운 청년을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온라인에서 만났다.
반백이 다 되어 그분과 통화를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설렘 또한 크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고 묻는 그분의 첫마디에 목이 메었다.
그 반가움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까.
어법에 어긋나도 좋다. 정말 너무너무 반가웠으니, 어순이 조금 틀리는 게 대수냐. 어쩌면 첫사랑을 만나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 싶다.
그 아름다웠던 스무 살 청년, 당신으로 인하여 학문에 뜻을 두었고 늦게나마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 청년은 삶의 끈을 찾아 준 사람.
그래서 시작한 공부.
이제는 안개가 걷힌 듯, 구름을 벗어난 별인 듯, 상큼한 삶이다.
..................................................
정녕 봄은 올 것이다!!
선생님을 만나기 두 시간 전.
동두천에서 강남까지는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30년 전의 야학교사로 우리 마을에 왔던 젊은 청년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정말로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공장에서 일해야 하는 시골 소녀들에게 그 청년은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던 사람이다.
공장 일을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면 피곤하지만 책을 챙기고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기쁨을 준 것만으로도 희망을 만들고 꿈을 만들어 주셨던 분이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이 꿈결 같고, 30년을 한순간에 뛰어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의 저편에는 스무살의 청년이 불러 주던 ‘가고파’라는 가곡이 뇌리에 스치며 그리움으로 반추된다.
졸음이 몰려 오는 저녁 어느 수업 시간.
공장일이 바빠서 책임량을 다하기 위해 화장실도 못 가고 무리하게 스웨터 짜는 기계에 매달려 일했더니 아무래도 곤했던 모양이다.
흑판 앞에서의 선생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올 쯤, “내 고향 남쪽바~~바다 그 파란 무~~을 눈에 보이네…” 목련화 등 그런 선생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피로에 지친 학생들의 잠을 깨워 주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어렵고 힘들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좋은 일이 있으려고 하는 노력이니 최선에 가깝도록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오늘의 견딤은 내일 희망의 주춧돌이 될 거라고…. 누누이 일러 주시던 선생님이셨다.
어느 비오는 저녁이었다.
내 어머니는 우산을 들고 학교까지 오셨는데 어머니의 그 남루함을 선생님이 보실까봐 “누가 우산 갖다 달랬냐”고 소리치며 어머니를 쫓듯이 돌려보내고 다시 교실에 들어온 나에게, 현재 처한 상황들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니 부디 자신의 삶에 충실해 줄 것을…. 그래서 좋은 습관으로 성실하게 삶을 채워야 한다고 깊은 메시지를 남겨 주셨던 분이다.
그리고, 오래도록 가슴에 울림으로 남은, 귀에 들려 올 것만 같은 “오늘을 내 최후의 날로 생각하라” 즉, 그 말뜻은 내가 정말 오늘 죽는다면 무엇이 두려우랴, 가난하면 어떻고 누구에게 언짢은 말을 들은들 어떠냐고, 내 최후의 날인데 조금의 후회라도 없애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최선을 다한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을 거라고….
20살 청년이 어떻게 그런 보석 같은 말만 골라서 했는지. 그분의 격이나 됨됨이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루하게 겨울은 매섭고 추웠다.
그리고 느지막이 찾아온 봄.
아직은 봄바람이 고운 햇살의 비춤을 시샘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정녕, 봄은 올 것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