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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5. 12.

라오스의 아홉 살 뚜이의 꿈

라오스의 아홉 살 뚜이의 꿈
 
세계에서 경제적 빈곤한 국가 중의 하나인 라오스를 아시나요. 라오스의 국토 면적은 한반도 크기의 1.1배 정도이며 인구수는 7백만 명 정도입니다. 국민 평균수명이 64세로 인구의 26%가 빈곤층으로 어렵게 살고 있으며 또한 전체인구의 27.3%가 문맹자이고 전체 인구의 51%가 20세 이하로 구성된 동남아에서 가장 오지로 불리는 나라입니다. 라오스는 한때 “백만 마리의 코끼리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란상’이라는 이름으로 루앙푸라방에 수도를 둔 나라였으나 1560년 수도를 루앙푸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긴 후 비엔티안이 라오스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은둔의 나라’,‘시간이 멈춰진 나라’로 세상에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나라입니다만 1989년 2월부터 서방 세계에 관광을 개방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까지도 ‘미지의 나라’로 불리고 있습니다. 라오스는 우리나라의 60~70년대와 같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국민들의 심성이 겸손하고 소박한 민족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하여 방비엥, 루앙프로방은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곳에 아홉 살 뚜이가 살고 있습니다. 뚜이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학교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농사를 져야 해요.’ 아홉 살 뚜이의 어깨에는 책가방 대신 무거운 삶의 무게가 가득 들려져 있습니다. 부모님을 대신해 농사일을 하는 뚜이는 새벽 찬 공기를 마시며 밭으로 향합니다. 하루 종일 찌는 듯한 무더위로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지만 뚜이는 온 종일 밭에서 농사일을 합니다. 뚜이네 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만 뚜이에겐 작은 욕심이 하나 있습니다. 남들보다 좋은 집에서 사는 것?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러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것? 그것도 아닙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뚜이의 욕심은 남들처럼 학교에 다녀보는 것이 어린아이인 뚜이의 꿈입니다. 그는 화려하지도 새것이 아니라도 좋지만 작은 칠판에서 하얀색 분필로 글씨를 쓰고 싶고, 책가방은 없지만 보자기에 보듬어 싼 책을 들고 싶고, 깨끗한 옷은 아니지만 엄마가 얻어 주신 옷을 입고 오늘도 학교로 향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뚜이의 이런 꿈을 엄마는 가슴이 저려오는 느낌으로 바라봅니다. 뚜이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해요.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 없네요.’그녀는 힘든 내색도 없이 오늘도 땡볕에서 농사일을 하는 뚜이를 보라보며 엄마로서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마음이 더 아려옵니다. 또 다른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인 11살짜리 안디는 가난 때문에 부모님이 매일 아침 비엔티안으로 일을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루 종일 4살짜리 동생을 돌봐야 합니다. 한시도 형의 곁을 떠나지 않는 안디의 동생 때문에 안디는 동생을 안고 학교에 등교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모두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지만 안디의 가정은 여전히 가난합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육비는 물론 생활비도 부족한 실정입니다. 매일매일 동생을 돌보며 학교에 등교하는 안디입니다. 이런 뚜이와 안디와 같은 어린아이가 너무나 많은 나라가 바로 라오스입니다. 뚜이와 안디와 같은 어린아이들이 풍요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 놓고 배움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가 이런 아이들을 후원한다면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후원하는 우리 스스로는 얼마나 행복해질까요? 인구의 절반이 20세 이하인 라오스는 학생들의 취학률이 초등학교 71%, 중학교 취학률이 39%, 고등학교 취학률이 19%, 그리고 대학교 취학률은 2%로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열악한 경제 환경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아이들 중에는 뚜이처럼 그리고 안디처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고, 또한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도 어울릴 수 없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의 학교라는 추억은 간직하지도 못한 채 그냥 일터로 내몰리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들도 우리의 아이들과 똑같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고 행복을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들을 외면하여 학교에 갈 수도 없고 친구와 함께 뛰어 놀 수도 없으며 오직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공부란 꿈에서나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을 위해 우리 함께 사랑을 선물하여 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보내주는 작은 사랑이 라오스의 빈곤 아동,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등불이 밝혀진다면 지구는 더 밝고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 차원 또는 여러 NGO 단체 등에서 동남아 국가들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지원이나 후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라오스에는 아직 제대로 된 지원이 거의 없어 UN 경제사회이사회 특별협의 지위를 획득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소년을 위한 NGO 단체 중의 하나인 비영리 공익단체 청예단(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서 제 3세계 빈곤 아동, 청소년을 위한 “행복 도서관 짓기 운동”의 일환으로 라오스에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청예단에서는 라오스에 도서관을 지어 주고 있고, 교육을 통한 빈곤한 아이들의 휴먼스토리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대학생과 고등학생 자원봉사자를 파견하고, 파견 직원을 통해 도서관운영과 마을 청소년 교육, 청소년 자원봉사자 실습 현장 마련, 대학생 봉사 활동 실시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예단에서는 도서관 짓기 운동 이외에도 ‘도서기부캠페인’과 라오스 책 오디오를 만들어서 시각장애인도 책을 들을 수 있는 ‘행복한 오디오북 캠페인’ 그리고 20개 학교의 낡은 칠판을 교체해 주기 위한 ‘YELLOW BOARD(희망의 칠판 캠페인)’을 함께 전개 하고 있습니다.
 
배울 수 있는 나이에 배우지 못하고 잘 먹을 수 있는 나이에 잘 먹지 못하는 것 역시 사회가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범하는 폭력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우리 가족 아니면 우리나라의 아이들만을 생각하고 그들만을 위한 활동을 하기 보다는 우리보다 훨씬 어렵고 힘들게 사는 여러 나라의 아이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공부를 하고 싶어도, 밥을 먹고 싶어도, 친구와 함께 놀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라오스의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은 그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행복을 만드는 일입니다.
 
청예단은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 학생들을 돌보고 가해 학생들을 선도하는 일을 17년 동안 해 오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을 위한 각종 사업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해외의 빈곤 청소년에게도 후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청예단에서 이름도 생소한 국가인 ‘라오스’에 도서관을 짓는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직 가정 형편이 어려워 점심을 거르는 아동, 청소년들이 있고 남들 다 다니는 학원 한 번 못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데 왜 그리 먼 나라 ‘라오스’까지 가서 도서관을 지어주려고 하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청예단은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청소년들이 함께 행복을 누려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외국으로부터 많은 혜택과 지원을 받아 이렇게 성장하였고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부러워할 정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베풀고 후원하는 일에는 아직 후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각 나라로부터 제대로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라오스를 후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동안 청예단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부모의 이혼 등으로 인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 혹은 자신의 진로를 찾기 위한 자발적 자퇴, 질병으로 인한 학업 중단한 청소년 그리고 왕따, 괴롭힘 등 학교폭력의 이유로 제도권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이 다닐 수 있는 조그마한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으로 오랜 기간 배움을 이어가지 못하고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청소년들은 쉽게 자신감도 잃어버리고 자존감도 낮아지게 됩니다. 이런 청소년들을 다시 배움의 길로 접어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잦은 결석, 몸에 밴 불규칙한 생활 습관, 무기력함 등이 일상화 되어버린 아이들은 목표의식도 업고 장래에 대한 설계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낭비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미래에 대한 자신을 심어주는 일이 우선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하여 그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대안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큰 삶의 변화를 주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지난 2003년 문화관광부 청소년육성기금 지원으로 2주간의 인도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대안학교 학생들은 이들이 만나고 본 인도의 자기 또래 청소년들이 자신을 둘러 싼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배움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보게 되었고, 또한 자신들이 당연하게 부모님께 요구하고 누렸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각이고 행동이며 누리기 어려운 것들이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대안학교 아이들은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자신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조금씩 대안학교 생활에 집중하게 되면서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고 지금은 모두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해서 대한민국의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청예단에서는 여러 차례 학교폭력 피해 청소년들과 인도, 네팔,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저개발 국가를 여행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또 그 여행을 통해 저개발국가 청소년들의 현실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개발국가의 청소년들을 만나고 올 때마다 ‘우리가 얻어간 만큼 저개발국가의 청소년들에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주자’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청예단이 해외사업에 대한 첫 발을 내딛기로 결심하고 여러 계획을 세울 즈음인 2009년에 청예단은 UN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특별협의지위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협의지위란 UN경제사회이사회 본회에는 직접 의제를 제안할 수는 없지만 제한적으로 발언할 수 있으며, 산하 기구회의에서는 제한 없이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며, NGO가 UN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얻은 지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여개의 NGO 단체가 UN 경제사회이사회에 등록되어 있으며 청소년 봉사단체로는 청예단이 유일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NGO들이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 나라의 어려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각종 지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라오스에 대한 지원은 상대적으로 미흡한 실정입니다. 이에 청예단은 아직 지원이 미흡한 나라인 라오스를 돕는 일이 더욱 보람찬 일이라는 생각으로 라오스를 돕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라오스를 돕기로 결심한 이후 청예단은 빈곤, 인권, 환경, 비폭력, 교육 등 다양한 도움 중에서 무엇이 라오스를 위해 가장 우선되어야 할 사업인가를 파악한 결과 교육지원이 우선이라 결정하여 교육 사업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라오스는 20세 이하의 젊은 층이 많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교육을 받았어도 취업할 직장이 없기 때문에 젊은 계층에 대한 교육이 라오스의 미래를 밝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라오스에서는 책을 쉽게 구하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학교에 일부 도서관이 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을 거의 보유하지 않고 있어 아이들이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으며, 도서관에 가고 싶어도 갈 도서관이 없다는 사실에 감안하여 라오스의 아동, 청소년들이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청예단은 마침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방큰 지역의 붕파우 마을에 도서관을 지어주려는 한국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행복도서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청예단은 이 프로젝트를 반드시 성공시키기 위해 1일 호프집, 바자회, 행복사과 팔기 등 다양한 모금 행사를 통해 건축비를 마련해 갔으며 이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2011년 12월 26일 라오스 현지에서 도서관 건축을 위한 첫 삽을 뜨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을 지을 마을은 라오스의 붕파우라는 곳으로 마을 전체가 572가구로 총 2,700여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마을 안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Room to read'라는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이 지어준 유치원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는 라오스의 시골 마을입니다. 처음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도서관을 짓겠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신뢰의 눈길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답사팀이 다녀가고 건축을 위한 해외 봉사단이 마을에 북적거리니 마을 사람들도 조금씩 신뢰를 보내게 되었고 도서관 건축을 위한 여러 가지 도움을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작업은 단순히 남을 돕기 위해 하는 단순한 일이 아닌 행복을 만드는 숭고한 정신이라는 마음을 바탕으로 청예단을 비롯한 도서관 건축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도서관의 못 하나, 나사 하나, 기둥 하나에도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건축에서의 문제는 자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품질이 뛰어난 것이 아니어서 건축과정에서 여러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고 또한 수시로 마을의 어른들과 의견 충돌과 갈등도 발생하였으나 서로 조금씩 양보해 가면서 결국 3개월 만에 도서관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청예단은 도서관 공사를 하는 기간에 한국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15명으로 이루어진‘청소년 평화 교육 봉사단’을 모집하였고 이들이 라오스에 가서 도서관 건축을 위한 노력 봉사, 초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하는 교육 봉사, 한국과 라오스의 음식, 놀이, 노래 등을 서로 배우고 알려주는 문화 봉사도 함께 하면서 양국의 친선도모에 기여하였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청예단의‘청소년 평화 교육 봉사단’은 매년 2~3회의 봉사단을 구성하여 라오스 도서관 현장으로 봉사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과 라오스, 두 나라의 우애와 협력, 그리고 그 소통의 현장에 우리 젊은 청소년들이 앞장 설 수 있도록 하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청예단은 앞으로도 라오스에 대한 많은 지원활동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라오스 아동,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지원 사업입니다.
도서관에 다양한 분야의 책을 비치하여 지역의 아동, 청소년뿐만 아니라 마을의 청년을 비롯한 성인에 이르기까지 독서를 통해 삶을 윤택하게 하는 만드는 일입니다. 또한 라오스의 아동,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교육지원을 통해 아동, 청소년들이 글을 몰라 평생 배움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을 방지하도록 교육 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며 또한 라오스 내에서도 방큰 지역 외에 교육 환경이 열악한 타 지역에도 도서관 건립을 비롯한 학교 내 교육 환경 개선사업 지원 계획 또한 책이 부족한 마을에는 책을, 교육 기자재가 부족한 마을에는 교육 기자재를, 물이 부족한 마을에는 우물을, 전기가 부족한 마을에는 자가 발전기를, 그리고 교사가 부족한 마을에는 교사를 지원하여 배움의 기회와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사업으로는 마을 청년들을 위한 직업교육입니다. 이 곳 청년들은 농사를 짓는 일 외에는 소득이 없습니다. 그런 마을의 청년들을 위하여 재봉, 컴퓨터, 미용, 의류 관련 직업 교육 등을 하여 준다면 얼마나 큰 행복이겠습니까? 직업 교육을 통해 라오스의 청년들이 새로운 분야의 직업에 도전해 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일은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활용할 수 있는 재봉틀이나, 컴퓨터, 미용용품들을 모아 그들의 직업 교육 재료로 활용하여 단순한 자원 활용 수준이 아닌 자연 환경과 인간을 생각하는 아름다운 활동을 계속 전개해 나갈 예정입니다.
세 번째는 빈곤으로 교육에서 소외된 아동, 청소년들을 위한 결연 사업입니다. 너무나 가난하여 부모가 가까운 태국, 캄보디아로 돈벌이를 떠나게 되면 어린 나이에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들은 자기보다도 더 어린 동생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엄두도 못 낼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거나 과일 열매를 따는 일로 학교를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이들 어린아이들을 위해 대한민국의 후원자들과 1:1 결연을 맺어주는 일입니다. 라오스에서 초등학생의 경우 연간 교육비가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30만 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월 2만 5천원만 있으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학교를 빠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나라의 뜻 있는 후원자들과 미래의 라오스를 이끌어나갈 아동, 청소년들이 결연을 통해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들도 또한 후원자들도 행복하리라 생각됩니다.
 
청예단에서 국내의 청소년 폭력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관심을 가지고 배울 수 있는 나이에 배우지 못하고 잘 먹고 성장해야 할 나이에 잘 먹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업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꿈을 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세계에서 함께 사는 모든 아동, 청소년들이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꿈꾸며 준비해 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됩니다.
 
청예단은 17년전 사랑하는 아들을 학교폭력으로 잃어버린 한 아버지에 의해 어렵게 시작하여 국민들에게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리고 그 예방과 근절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미 월간조선 3월호를 통해 학교폭력의 심각성과 문제점을 알리면서 학교폭력예방에 함께 동참하자는 내용을‘박시호의 행복편지’-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 다오’편을 통해 소개한 바 있습니다. ‘1995년 6월 8일 16살의 꽃다운 나의 아들 대현이가 5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스스로 죽음으로 그동안 학교에서 폭행과 협박 그리고 강탈이 뒤범벅된 집단 괴로힘 끝에 삶을 마감하고 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갔습니다. 내 사랑하는 외아들 대현이는 해외생활도 잘 적응하였고 한국에서 학교생활도 잘 적응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반장으로 선출되어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높고 활달하던 대현이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홀로 다른 학군의 모 고등학교로 배치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내 아들은 준수한 얼굴과 좋은 성적으로 남녀 간에 인기가 높아 소위 짱들의 타깃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학교 친구들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낯선 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의 짱들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과 구타를 당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몰랐습니다. 가끔 이상한 느낌이 있어 물어 볼 때면 거짓말로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대현이가 그렇게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회사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가장의 큰 일인양 생각하고 가정에는 너무나 소홀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대현이는 운동도 잘하고 덩치도 컸지만 하늘같은 형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아들은 끝내 온몸으로 항거하며 아파트에서 두 번이나 몸을 던져 이 부모 가슴에 이토록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남기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고 괴로웠으면 차라리 죽을 생각을 하고 또 결행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저는 부모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며 이 힘든 길을 선택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젠 쉬고 싶어요’16살 대현이가 남긴 마지막 메모입니다.----”
 
지금도 정부를 비롯한 각종 사회단체, 학교 등에서 학교 폭력 예방에 대한 대책을 발표하고 있으며 조선일보를 비롯한 많은 언론에서 집중 보도를 통해 예방활동에 나서고 있지만 지금도 많은 학교에서는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또한 아무 죄의식 없이 폭행에 가담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은 얼마 전 대구에서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한 14세 중학생을 비롯한 몇 명의 학생들의 자살 소식 입니다. 14세 김모 학생의 절절한 내용을 보면서 우리의 소명이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가 남긴 편지를 옮겨 봅니다.
 
제가 그동안 말을 못했지만, 매일 라면이 없어지고, 먹을 게 없어지고, 갖가지가 없어진 이유가 있어요. 제 친구들이라고 했는데 XXX하고 XXX이라는 애들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절 괴롭혔어요. 매일 라면을 먹거나 가져가고 쌀국수나, 용가리, 만두, 스프, 과자, 커피, 견과류, 치즈 같은 걸 매일 먹거나 가져갔어요.
 
3월 중순에 XXX라는 애가 같이 게임을 키우자고 했는데 협박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매일 컴퓨터를 많이 하게 된 거에요. 그리고 그 게임에 쓴다고 제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 등수는 떨어지고, 2학기 때쯤 제가 일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그 친구들이) 계속 돈을 달라고 해서 엄마한테 매일 돈을 달라고 했어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담배도 피우게 하고 오만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빡지까지 써줬어요. 게다가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때리고 나중에는 XXX이라는 애하고 같이 저를 괴롭혔어요.
 
키우라는 양은 더 늘고, 때리는 양도 늘고, 수업시간에는 공부하지 말고, 시험문제 다 찍고, 돈벌라 하고, 물로 고문하고, 모욕을 하고, 단소로 때리고, 우리가족을 욕하고, 문제집을 공부 못하도록 다 가져가고, 학교에서도 몰래 때리고, 온갖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는 등 그런 짓을 했어요.
 
12월에 들어서 자살하자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저를 막았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저도 정말 미치겠어요. 또 밀레 옷을 사라고 해서 자기가 가져가고, 매일 나는 그 녀석들 때문에 엄마한테 돈 달라하고, 화내고, 매일 게임하고, 공부 안하고, 말도 안 듣고 뭘 사달라는 등 계속 불효만 했어요.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너무 죄송했어요. 하지만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족이었기에 쉽게 죽지는 못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몸은 성치 않아서 매일 피곤했고, 상처도 잘 낫지 않고, 병도 잘 낫지 않았어요. 또 요즘 들어 엄마한테 전화해서 언제 오냐는 전화를 했을 거예요. 그 녀석들이 저한테 시켜서 엄마가 언제 오냐고 물은 다음 오시기 전에 나갔어요.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남한테 말하려고 했지만 협박을 했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쯤에 김○○이나 윤○○이란 애들이 자세하게 설명해줄 거예요.
 
오늘은 12월 19일, 그 녀석들은 저에게 라디오를 들게 해서 무릎을 꿇리고 벌을 세웠어요. 그리고 5시 20분쯤 그 녀석들은 저를 피아노 의자에 엎드려놓고 손을 봉쇄한 다음 무차별적으로 저를 구타했어요. 또 제 몸에 칼등을 새기려고 했을 때 실패하자 제 오른쪽 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할머니 칠순잔치 사진을 보고 우리 가족들을 욕했어요. 저는 참아보려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걔들이 나가고 난 뒤, 저는 제 자신이 비통했어요. 사실 알고 보면 매일 화내시지만 마음씨 착한 우리아빠, 나에게 베푸는 건 아낌도 없는 우리엄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우리 형을 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거예요.
 
제가 일찍 철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아마 여기 없었을 거에요. 매일 장난기 심하게 하고 철이 안든 척 했지만, 속으로는 무엇보다 우리 가족을 사랑했어요. 아마 제가하는 일은 엄청 큰 불효인지도 몰라요. 집에 먹을 게 없어졌거나 게임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내실 때,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단 그 녀석들에게 당하고 살며 효도도 한번도 안한 제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러웠어요. 제 이야기는 다 끝이 났네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저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저희 가족을 기다릴게요.
 
12월 19일 전 엄마한테 무지하게 혼났어요. 저로서는 억울했지만 엄마를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그 녀석들은 그날 짜증난다며 제 영어자습서를 찢고 3학년 때 수업하지 말라고 XXX은 한문, XXX는 수학책을 가져갔어요. 그리고 그날 제 라디오 선을 뽑아 제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 하였고, 5시 20분쯤부터는 아까 한 이야기와 똑같아요.
 
저는 정말 엄마한테 죄송해서 자살도 하지 않았어요. 어제(12월 19일) 혼날 때의 엄마의 모습은 절 혼내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저를 걱정하시더라고요. 저는 그냥 부모님한테나 선생님, 경찰 등에게 도움을 구하려 했지만, 걔들의 보복이 너무 두려웠어요. 대부분의 학교친구들은 저에게 잘 대해줬어요. 예를 들면 윤OO, 김OO, OOO, OOO, 최OO, 이OO, 장OO, 황OO, 최OO, 전OO, 이OO, 장OO, 이OO, 김OO, 남OO, 유OO 등 솔직히 거의 모두가 저에게 잘해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저는 매일 매일 가족들 몰래 제 몸의 수많은 멍들을 보면서 한탄했어요.
 
항상 저를 아껴주시고 가끔 저에게 용돈도 주시는 아빠, 고맙습니다.
매일 제가 불효를 했지만 웃으면서 넘어가 주시고, 저를 너무나 잘 생각해주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항상 그 녀석들이 먹을 걸 다 먹어도 나를 용서해주고, 나에게 잘해주던 우리 형, 고마워.
그리고 항상 나에게 잘 대해주던 내 친구들, 고마워.
또 학교에서 잘하는 게 없던 저를 잘 격려해주시는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바꿔주세요. 걔들이 알고 있어서 또 문 열고 저희 집에 들어올지도 몰라요.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아빠 매일 공부 안 하고 화만 내는 제가 걱정되셨죠? 죄송해요.
엄마 친구 데려온답시고 먹을 걸 먹게 해준 제가 바보스러웠죠? 죄송해요.
형. 매일 내가 얄밉게 굴고 짜증나게 했지? 미안해
 
하지만, 내가 그런 이유는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앞에서 밝혔으니 전 이제 여한이 없어요. 저는 원래 제가 진실을 말해서 우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지만 제가 진실을 말해서 억울함과 우리가족 간의 오해와 다툼이 없어진 대신, 제 인생 아니 제 모든 것들을 포기했네요. 더 이상 가족들을 못 본다는 생각에 슬프지만 저는 오히려 그간의 오해가 다 풀려서 후련하기도 해요. 우리가족들, 제가 이제 앞으로 없어도 제 걱정 없이 앞으로 잘 살아가기를 빌게요.
 
저의 가족들이 행복하다면 저도 분명 행복할 거예요.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우리는 한 곳에서 다시 만날 거예요. 아마도 저는 좋은 곳은 못갈 거 같지만 우리가족들은 꼭 좋은 곳을 갔으면 좋겠네요.
 
매일 남몰래 울고 제가 한 짓도 아닌데 억울하게 꾸중을 듣고 매일 맞던 시절을 끝내는 대신 가족들을 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그리고 제가 없다고 해서 슬퍼하시거나 저처럼 죽지 마세요. 저의 가족들이 슬프다면 저도 분명히 슬플 거예요. 부디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빌게요.
 
-우리 가족을 너무나 사랑하는 막내 ○○○ 올림-
 
P.S. 부모님께 한 번도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말 못 전했지만 지금 전할게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참으로 가슴 아픈 편지입니다. 이 지경이 될 동안 우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앞으로도 청예단은 학교폭력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사명감을 갖고 활동할 것입니다. 또한 청예단은 국내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나라에서 고통 받는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지원활동에 더욱 관심을 갖고 국민들과 함께 사업을 전개해 나갈 예정입니다. 우리나라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에 있는 많은 나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각 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세계인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보다 어려운 여건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도 조그마한 도움의 손길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올바른 교육의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소외되어 힘들게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어깨를 내어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는 일을 성실히 수행해 갈 것입니다. 지구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이제 어려운 나라의 아이들을 위한 좋은 활동에 많은 분들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이 활동을 통해 도움을 주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건전하고 올바르게 성장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활동도 계속할 예정입니다. ‘청소년 평화 교육 봉사단’에 참여하고 활동을 경험한 학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봉사활동을 통해 우애와 협력을 배우고 또한 배려와 나눔 그리고 진정한 소통을 배우는 우리 젊은 청소년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이번‘청소년 평화 교육 봉사단’참여하고 돌아 온 고등학생 김△△의 해외 봉사 활동 후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2012년 1월 25일(수) 오후 11시, 베트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라오스 행복도서관 건립을 위한 해외봉사단 1기들이 인천공항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힘들었으나 행복했고, 가끔 짜증도 났지만 재미있었던 라오스 해외 봉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인천, 베트남, 라오스 순으로 숙소의 질은 떨어졌다. 라오스에 도착한 이후, 우리는 버스를 대절하여 붕파우 마을로 향했다. 설렘과 걱정으로 뒤섞인 버스에서는 잠도 오지 않았다.
 
1. 라오스 아이들과의 만남과 문화 봉사
 
첫 교류를 위하여 우리는 붕파우 마을의 초등학교에 갔다.
그곳에서는 붕파우 마을의 아이들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환영 이벤트에 해외봉사단 일행은 모두 기쁨과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라오스는 초등학생들도 교복을 입는 것 같았다. 하얀 웃옷에 검은 바지. 그들의 손에는 그들이 손수 만든 꽃목걸이가 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한 이후 그들은 우리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마을을 구경했다. 마을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문명과 동떨어진 사람들. 처음 보는 외국인들에게도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여유로움, 평안한 성격,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 한국에서도 보았을 법한 흙길 등. 마을의 첫 인상은 무척이나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일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첫날부터 일정이 바뀌었다. 노력 봉사 시간이었지만, 갑작스런 라오스 아이들의 방문으로 일정은 문화 봉사 시간과 바뀌게 되었다. 문화 봉사를 하면서 우리는 그들과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우리는 5일 동안 라오스의 아이들과 함께 했다. 종이접기, 제기차기, 게임, 율동 연습, 흰 티에 물감으로 그림 그리기, 페이스 페인팅, 집 만들기 등 다양한 활동도 했다.
처음에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해서 프로그램 진행 시간에 여유를 두고자 했다. 하지만 예상과 너무 달랐다. 아이들이 잘 따라주어서 일정이 빨리 끝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2~3시간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프로그램을 모두 마쳤는데도 시간은 1시간 가량이 남아 봉사단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 이후부터 우리는 회의를 하면서 일정을 아주아주 빡빡하고 빽빽하게 짜 가야 했다. 덕분에 그 이후부터는 시간이 모자라 걱정을 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우리(문화 봉사팀)도 어려운 일정이 있었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건물 짓기라는 놀이감을 가져갔다. 그것은 3~6세가 적정 연령이라 써져 있었다. 그래서 ‘6세용이 뭐가 어렵겠어’하는 생각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사진을 찍으며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한국인 한 분과 라오스 어른도 함께 해야만 했다. 다행히 무사히 마무리를 짓긴 했으나, 식은땀을 닦던 그 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 내가 흘린 땀과 시간만큼의, 아니 그 이상의 가치
 
문화 봉사가 끝난 이후에는 한 시간 가량의 점심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했던 점심시간이 끝나면, 노력 봉사 시간이 된다.
노력 봉사란, 라오스 행복 도서관 옆의 유치원 페인트 칠하기, 도서관 울타리 세우기 등이었다. 사실, 별로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중 가장 쉬워 보였던 페인트를 택했다. 다른 일들에 비하면 신사적인 활동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듯이 그 일의 쉬움조차 상대적인 말이었다. 페인트칠을 하는 동안 우리는 너무 힘들었다. 물론 육체적인 힘듦은 적었다. 해도 비추지 않는 그늘에서 일을 했으며, 가끔은 앉아서 유치원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릇, 일이란 하면 할수록 목표와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 점점 끝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아야 행복해지고 희망을 갖게 돼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은 그렇지 않았다.
해도 한 듯 보이지 않았고, 페인트 칠을 할 유치원은 너무 넓고 높았다. 그리고 환풍구는 너무 많았다. 그래서 결과물에 뿌듯해 하는 울타리 팀과는 대조되게 우리 페인트 팀은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져만 갔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자, 육체적으로도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지면서 우리는 건들기라도 하면 금세 터져 버리는 시한폭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 다른 봉사팀과 역할을 바꾸어 울타리를 세우는 작업을 하게 되면서 그동안 ‘나의 불만은 투정에 지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울타리 작업은 정말 힘들었다. 특히 땅을 파는 데 있어서는 내가 한국의 학교에서 파던 땅과 너무 다름을 느꼈다. 아무리 찍어도 땅이 파이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땅을 파며 그동안의 투정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딱 1회 했을 뿐이지만, 나는 어깨에 알이 배겼고, 양 손에 물집이 잡혔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울타리 기둥이 세워졌다는 뿌듯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3. 헤어짐과 눈물, 그리고 그리움
 
마지막 노력 봉사가 끝난 후 우리는 짓궂은 장난을 하기로 했다. 그 동안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사진으로 엮은 다음, 슬픈 노래와 함께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내가 충분히 모질어졌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울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애들이 울면 멋진 사람처럼 위로해줘야지’ 라고 생각하며 그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만큼 모질지 못했다. 허각의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노래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슬픔을 느꼈다. 고3이나 되어서 이런 것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어이없었고, 웃겼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의 위로를 받으며 그만 울어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또 울음이 나왔다. 내가 울자, 주변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네 명쯤이 나를 안아주었다. 사방에서 안긴 채 나는 또 울었고, 내가 우니까 아이들도 울었다. 음악이 진짜 하이라이트로 치닫자, 나는 음악이 슬퍼서 다시 울었다. 우리가 우니까 사방에서 한두 명씩 울었고, 울면서 내게 오는 아이들도 많아졌다. 나는 팔을 최대한 뻗어, 아이들을 꼭 안아주었다.
 
내 울음은 단지 헤어짐의 울음이 아니었다. 그들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도, 라오스도, 붕파우 마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면 그들의 순수함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아니다’였다. 그래서 그게 너무나 슬펐다. 그들과 만남에 즐거웠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순수함, 순박함이 나는, 그게 정말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수 없음에 울음이 터졌다.
 
라오스에서의 10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는 라오스 아이들과 보낸 시간과 그들의 순박한 얼굴 하나하나가 떠오른다.
보고 싶다. 한국에 와서 나는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라오스보다 부족한 게 무엇일까? 살아가는 삶의 질은 반드시 물질적 만족이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안녕, 라오스! 함께 했던 짧은 시간동안 나와 웃고 울었던 라오스의 어린 친구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모두 안녕, 안녕, 안녕---------
 
우리 함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관심과 사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돕기 위한 후원에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빌 게이츠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우리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하버드 졸업장보다 소중한 것은 독서하는 습관이다.’ 빌 게이츠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꿈꿔 봅니다.
 
■ 후원계좌 : SC제일은행 378-10-011886 (예금주 : 청소년폭력예방재단)
■ ARS 후원전화 : 060-700-1479 (천사친구)

2012. 3. 1.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 다오. 박시호의 행복편지-월간 조선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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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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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호의 행복편지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 대현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 16세 대현이는…

글 : 박시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사진 : 박한나 Illustrator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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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내용은 학교폭력으로 아들을 잃은 후 청소년폭력 예방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청소년폭력 예방재단 김종기 명예이사장의 얘기를 행복편지에서 정리한 것입니다. 이진영 시인은 김 명예이사장의 지인입니다.

박시호 happyletter.park@gmail.com 
⊙ 57세. 중앙대 경영학과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동국대 법무대학원 문화예술관련법
    석사 과정.
⊙ 재무부장관 비서관,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http://sihopark.com.ne.kr twitter@parksiho 

박한나 parkreative@gmail.com
⊙ 홍익대 국제디자인박사 디자인학 과정(휴학). University of the Arts London 석사(Illustration 전공).
⊙ 前 제일기획 아트 디렉터.
⊙ 영국 런던에 거주하며 작가 활동 중.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대현아 내 사랑하는 아들 대현아! 
  
  한창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꽃잎처럼 네 몸을 던져 이 모진 세상을 떠나버렸구나. 
  
  그토록 싱싱했던 너의 몸매, 그토록 아름답던 너의 얼굴을 한 줌의 재로 바꿔 속초 앞바다에 뿌리며 목놓아 외쳐대던 네 이름 대현아! 
  
  너는 너무도 비정하게 우리를 슬픔과 고통 속에 남기고 떠나버렸구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너. 
  
  산 위에 오르면 구름 속에, 들꽃 사이에 피어났다 스러지는 네 얼굴, 너는 항상 내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지. 포도를 좋아했던 너는 포도알과 함께 살아나고, 파파이스의 닭요리를 좋아했던 너는 파파이스 가게 간판과 함께 살아나고, 유난히 모자를 좋아했던 너는 네 또래의 모자 쓴 학생만 봐도 되살아나고, 내 생일선물로 사준 내의를 입을 때마다 너의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살아난단다.
  
  어쩌다 너를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어 기다리지만 정작 너를 만난 다음 날은 그다지도 우울할 수가 없어 꿈 얘기를 안 하고 지나는 날이 많단다.
  
  지금도 네 생일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수많은 네 친구. 설날이면 세배 오는 네 친구들. 가슴이 찢어지는 6월 8일 네 영혼을 위로하는 날마다 찾아오는 네 친구들을 볼 때마다 네 엄마나 나는 너를 대하듯 반갑기는 하지만 목이 메어 할 말을 다 못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단다. 지금은 의젓한 대학생이 되어 한창 바쁘게 휘젓고 다닐 네가 없는 이 부모의 마음은 항상 응어리져 피멍이 맺혀 있단다. 
  
  
  네가 힘들어할 때 난…
  
  무엇이 그토록 너를 방황하게 했던가?
  
  무엇이 너를 죽음까지 몰고 가게 했던가?
  
  나는 과연 너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이해했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믿고 사랑했었던가?
  
  대현아!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나는 세상의 헛된 명예와 돈만을 위해 살아 왔었구나.
  
  미친 듯 회사 일에만 쫓겨 살았지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던가?
  
  네가 힘들어할 때 친구가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네 인격을 존중하고 네 취향을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나는 내 방식대로 네게 너무 무리한 것만 요구했었지?
  
  운동도 잘하고 반장까지 했던 너를 만족하지 못하고, “1등 해라, 저것 해라!”하고 계속 내 방식대로만 요구했었지.
  
  대현아! 네 넋이라도 나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네 엄마를 지켜다오.
  
  네 엄마가 이렇게 버티며 곱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란다.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했었어. 네 엄마는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하며 봉사활동도 시작했단다.
  
  너를 잃은 뒤, 우리 남은 가족에겐 바뀐 것이 많지만 그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란다.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대현아! 내 목숨보다도 귀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만약 인간의 목숨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너를 대신 살려내서 나보다 값있고 멋있게 살아가도록 하고 싶구나. 내 마음을 받아주고 용서해다오.
  
  대현아, 뒤늦게나마 택한 이 길이다.
  
  세상의 모든 욕망을 던져버리고 너와 같은 애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노라고 택한 이 길이구나.
  
  물론 힘들지. 나 혼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도 없지.
  
  그러나 너 때문에 택한 가시밭길인데 어찌 후회하고 물러설 수 있겠니?
  
  힘이 들 때마다 지갑 속의 네 모습을 대하면서 ‘힘을 다오’ 속삭이며 지금껏 열심히 해오고 있단다.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동안 변한 것도 많단다.
  
  넌 지켜보고 있겠지?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너처럼 아까운 죽음이 없고, 이 못난 아비처럼 피맺힌 아픔이 없는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구나.
  
  대현아, 너를 사랑한다.
  
  하늘나라에서 서로 만날 날까지 편히 쉬거라. 내 아들아!
 
아버지가

  
대현아!
  넌 이제 하늘에 핀 꽃이 되었구나.
  지상에서는 열여섯에 그만 허리가 부러져
  꽃망울 한번 맺어보지 못한 어린 청춘이더니
  하늘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꽃으로 피었구나.
  꽃으로 활짝 피어서
  또 다른 열여섯, 열일곱, 열다섯
  이 땅의 어린 청춘들
  두 눈 부릅뜨고 지켜주고 있구나.
  대현아!
  너를 보내고 처음 돌아올 땐
  모든 것이 눈물이더니
  모든 노래가 눈물이더니
  이젠 모든 눈물이 노래가 되었구나.
  너의 어린 뼛가루를 속초 앞바다에 흩뿌리고 돌아올 땐
  모든 웃음이 울음이더니
  이젠 모든 울음이 웃음이 되었구나.
  사랑이 되었구나.
  사랑이 되었구나.
 
  하늘에 핀 꽃 대현아!
  너를 보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보았다
  네가 받은 그 수많은 표창장 뒤에 숨어 있던
  학교 생활의 비애를
  네가 받은 우등상장과
  네가 받은 개근상장과
  네가 받은 반장 임명장 뒤에 숨어 있던
  학원 폭력의 발톱을
  그때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카인이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앙굴라마였다.
 
  대현아, 보아라.
  비록 너의 어린 몸은 갔어도
  너의 맑은 영혼은 이제 십자가로 남아
  하늘의 꽃으로 피어 있는 것을
  청예단으로 활짝 피어나
  이 땅의 어린 청춘들을 말없이 지켜주고 있는 것을
  그래 대한민국에 핀 너의 그 십자가 영원하리
  그래 하늘에 꽃 핀 너의 그 십자가 무궁하리!

2002. 11. 1
  시인 이진영
 

대현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어느덧 무정한 세월은 흘러가 계절이 바뀌고 새해가 되었는데도
  
  보고 싶은 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구나.
  
  보고 싶은 대현아!
  
  이 엄마는 언제나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불러도 대답 없는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텅 빈 너의 방 책상 앞에 앉아서 매일 눈물로 기도한단다.
  
  무엇이 착한 너를 그토록 괴롭게 하고
  
  무엇이 여리기만 하던 너에게 그토록 무서운 생각을 갖게 하였는가?
  
  너로 인해 엄마 아빠는 행복했었고 네가 있어 삶이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슬픔으로 가슴이 저리고 원통함과 허망함으로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등하굣길의 네 또래의 남학생들에 시선이 머물고
  
  학교 앞길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단다.
  
  행여나 네 친구가 누구라도 없나 하고 말이야.
  
  너에 관계되는 모든 게 다 소중하게만 생각되는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기억하겠지?
  
  엄마 아빠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그리고 이 말은 너에게 확실하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단다.
  
  너의 대답은 며칠 전 꿈속에서 분명하게 들었지.
  
  더 커진 모습으로 내 품에 꼭 안겨서 엉엉 울면서 “존경했었어요”라고
  
  너무나도 처절하고 절실하게 말했었지.
  
  나는 꿈속의 너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현재의 너의 진실한 모습이라 믿고 영원히 살아가련다.
  
  
  대현아!
  
  또 한 가지 너에게 들려줄 게 있는데
  
  네가 간 곳으로 따라가겠다고 울며불며 발버둥치던 그 많은 좋은 너의 친구들이
  
  저번 여름 방학에도 너를 만나러 그 엄마들과 함께 동해바다에 갔다는구나.
  
  대현아!
  
  너를 잊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기억하고
  
  하늘나라에서나마 편히 잠들거라.
  
  다시는 이 땅에 너처럼 한 맺힌 영혼이 없도록 하는 데
  
  엄마 아빠는 노력할게.
  
  안녕…
 
1996. 2. 7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16세 대현이는…

  1995년 6월 8일. 16세의 꽃다운 나의 아들 대현이가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으로 그동안 학교에서 폭행과 협박 그리고 강탈이 뒤범벅된 집단 괴롭힘 끝에 삶을 마감하고 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갔습니다. 내 사랑하는 외아들 대현이는 해외생활도 잘 적응하였고 한국에서 학교생활도 잘 적응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반장으로 선출되어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높고 활달했습니다. 그런 대현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홀로 다른 학군의 모 고등학교에 배치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내 아들은 준수한 얼굴과 좋은 성적으로 남녀 간에 인기가 높아 소위 짱들의 타깃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학교 친구들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낯선 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의 짱들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과 구타를 당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몰랐습니다. 가끔 이상한 느낌이 있어 물어볼 때면 거짓말로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대현이가 그렇게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회사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가장의 큰일인 양 생각하고 가정에 너무나 소홀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대현이는 운동도 잘하고 덩치도 컸지만 하늘 같은 형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아들은 끝내 온몸으로 항거하며 아파트에서 두 번이나 몸을 던져 이 부모 가슴에 이토록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고 괴로웠으면 차라리 죽을 생각을 하고 또 결행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저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며 이 힘든 길을 선택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젠 쉬고 싶어요.’ 16세 대현이가 남긴 마지막 메모입니다.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건강한 아이에게 무엇이 그토록 지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학교 선배 5명의 끈질긴 괴롭힘이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견디기가 힘든 아들은 결국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해외출장 중에 벌어진 그 엄청난 충격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지만 부끄럽고 놀라워 그저 조용히 사건을 마무리해 나갔습니다. 아직 미성년자였고 아이 엄마를 생각해 화장한 뼈를 멀리 속초 앞바다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 저는 무참히도 울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연이어 붕괴되면서 사회가 극도의 정신적 충격에 휘말려 매사가 혼돈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확한 사연도 알아야 하고 특히 대현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가해 학생 5명을 하나씩 찾아내 반성문을 받아냈습니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 아이들을 어쩌지 못하고 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바쁜 회사 일에 매달리며 잊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악몽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우리 대현이를 그토록 괴롭히던 아이들이 또 다른 대현이 친구 2명을 불러내 얼마나 두드렸는지 한 애는 팔이 부러지고 한 애는 기절까지 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내 분노는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는 검사를 찾아가 처벌을 의뢰하고 만약에 국가가 못 한다면 내 개인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그 다섯 아이를 이 세상에서 끝내버릴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두 명의 피해학생 어머니는 완강히 진술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더 이상 폭력 문제를 법에 고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비로소 이 학교폭력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학교, 가정, 학생 등 사회 모두에게 엄청난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결심에 내 아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려 해”
  
  ‘부모에게 말하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 ‘누나도 가만 두지 않겠다.’ 각목으로 폭행을 일삼던 가해학생들을 만나 보니 그저 겁에 질린 고등학교 2학년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 사회에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대장이었지만 어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고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는 공허한 소리만이 그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학생을 폭행하고 돈을 뺏고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학교는 진실을 외면했고, 다른 피해자 부모들은 사실을 숨기기 바빴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왜 시끄럽게 만드느냐? 당신 혼자 떠든다고 세상이 바뀌는 줄 아느냐? 우리 아이가 장난으로 한번 때린 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고 대현이의 죽음을 우리한테 문제 삼느냐? 학교에서는 어린아이들끼리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왜 큰 문제 있는 학교인 양 난리치고 있느냐?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식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이기주의 앞에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학교는 그리고 우리의 학부모들은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대현이의 죽음은 천지를 바꿔놓았습니다. 저는 원래 한 회사 중견 경영인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학교폭력을 그냥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폭력 문제 전문가처럼 되어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룹사 기조실장으로 엄청나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지만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한 사업이 ‘학교폭력예방재단’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재단 설립 준비를 마치고 설립허가를 서울시에 냈는데 담당자의 의견이 학교폭력이라는 용어가 들어가는 단체는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겪는 폭력은 학생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불량학생에 의한 것이지 학교 자체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라는 이름 대신 청소년폭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허가 신청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는 학교폭력이라는 용어나 문제의식은 없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이지메라는 생소한 일본어로 전하는 시절이었습니다. 학교도 이러한 문제를 노출시키지 않고 소수의 분쟁, 자라면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정식으로 거론하는 것을 심히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피해학생은 당하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감히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며, 피해 부모님 측도 보복이 두렵고 자기 아이만 무사히 진학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두려움 속에 참고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대기업 전무는 누구든 하지만 학교폭력 예방은 내가 할 수밖에 없어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을 설립하고 한 달도 안 돼 그렇게 피하고 싶던 ‘학교폭력’이란 단어가 전국 최대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학교폭력 실태를 고발하는 언론 보도를 보고 격노해 고건 총리 내각에 ‘학교폭력 근절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막중한 그룹 기조실장 전무가 한편으로 시민운동을 한다고 하니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회장실에서 호출이 오더니 ‘이 일은 쪽박 차기 딱 맞는 일인데 바로 사장 직함으로 승진하든가 아니면 사표를 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분명했습니다. 그날 오후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사장은 적임자가 많이 있지만, 이 일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꿈도 펼쳐보지 못한 상태에서 하늘나라로 간 대현이를 지켜주지 못한 죄를 늦게라도 갚아야 했기에, 제게는 사장 직함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아들이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못난 아비가 이제라도 아들에게 사죄하는 심정에서 어렵지만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일을 시작하면서 학교폭력이라는 거대한 철옹성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내부적으로는 전문 직원을 양성하면서 비영리 공익단체를 한 개인이 꾸려간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피눈물나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끝없는 희생과 긴장과 구걸과 투쟁의 세월이었습니다. 만나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늘 저에게 하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어떻게라도 도움을 받으면 제가 쓴 돈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의 짐이 되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항상 죄인처럼 지내는 심정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직원들 급여를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임차료는 당연히 체불되고… 하물며 색안경을 쓰고 다른 눈으로 바라볼 때는 정말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리 힘든 일을 하고 있나?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가슴 깊이 다짐한 아들과의 약속이고 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을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으로 자녀들을 살리고 감사의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모님들을 만날 때 저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또 이 일을 하면서 가슴이 따뜻한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 저는 큰 힘을 받고 다시 힘을 내서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기를 반복합니다.
  
  마음 아픈 일보다는 좋은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속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 내면에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이 일을 하지 않고 다른 활동을 하고 살았다면, 항상 세상을 혐오하고 원망하며 어둡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던지고 죽도록 봉사함으로써 비로소 그 몹쓸 죄책감을 이기고 원통함과 가슴 저리는 고통을 극복하고 역설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면 조금 이해가 되실는지요? 저는 이것이 우리 내외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청예단을 살렸다고 믿습니다.
  
  
  지난 17년간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사회가 뭘 해줬나?
 

  학교에 만연된 고질병, 그 그늘에서 학교 가기를 두려워하고 낙오하는 어린아이들, 치유하기 힘든 정신적 질환까지 앓고 가정까지 파괴하는 불법 폭력! 갑자기 폭력적인 학생들에게 끌려가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해 세 살 나이의 지능으로 뇌기능을 상실해 영원히 환자로 살아야 하는 유리 양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중학교 3학년인 15세 때 폭행을 당해 지금도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우는 유리 양! 누가 그녀와 그 부모의 아픔을 없애줄 수 있겠습니까? 파출부로 어렵게 사는 형편에 병원에 1년 이상 누워 있다는 하도 딱한 사연에 간호사가 우리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한 것이 인연이 돼 신문에 사연이 나가고 그때 전국에서 한푼 두푼 6000만원을 모아 병원비를 대준 것이 우리 사회가 한 전부가 아니었던가요? 우리는 유리 양처럼 억울하고 딱한 사연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왜 외면하고 있을까요? 아버지의 가출과 어머니의 끝없는 눈물. 그 가정은 도저히 행복하기 어려운 비참한 상황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저 자신마저 학교폭력 문제해결이라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17년 가까이 많은 일을 해왔건만 결과적으로 그래서 무슨 개선이 있었는가 하는 자문을 해볼 때에 두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학생과 그 부모를 위해 상담부터 최선의 도움을 드리고자 노력해 왔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 학교폭력의 실태를 해마다 조사해 알리고 관련 전문도서를 발간하고, 국가의 어느 부서인가는 이 문제에 항상 깨어 있도록 소리쳐 왔다는 것 등으로 자위하고 싶지만, 우리 사회에서 생업도 포기하고 월급도 없이 비영리 공익법인을 만들어 홀로 버텨나가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았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학교폭력 문제가 제기되고 나서부터 오늘까지의 17년 동안 어린 초등학생이며 여학생까지 더욱 끔찍한 사건들로 점철해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이 나라는 국민을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원망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건이 날 때만 잠시 뉴스로 나오고 금방 모든 것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무척 한탄스러웠습니다. 이번 대구 중학생의 자살 직전의 자필유서는 어리고 착한 학생의 엄청난 고통과 폭력의 무서움과 죽기 직전의 효심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연말에 모든 국민에게 다시 한 번 큰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자기 손자를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되었으나 취학 등록을 뒤로 미루고 태권도 도장부터 열심히 보내는 할머니를 잘 압니다. 학교에 가서 남에게 맞거나 심부름질당하지 않도록 담력과 체력을 키워 보내야겠다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만난 한 아버지는 늦둥이로 얻은 자기 중학생 딸을 아예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생활비 때문에 무척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 딸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폭행을 당해 정신병을 앓거나 반항아로 비뚤어지게 자라는 것을 우려해 무리하게라도 유학비를 대면서 정작 자기들은 최대한 절약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사연들입니까?
  
  또한 가해학생들이 성인이 돼서 범죄자로 전락해 사회의 부담이 되는 경우가 일반 청소년에 비해 3~4배나 높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폭력의 피해학생이나 가해학생이나 모두가 사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학교폭력을 망국병이라고 합니다.
  
  
  교권은 추락하고 학생 인권만 강조하는 세상이니…
  
  이처럼 무서운 망국병인 학교폭력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아직 소득이 낮아 인권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한 저개발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들 선진국들도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해 오면서 공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방향은, 다수의 선량한 학생을 보호하는 데 많은 비용과 인력을 쓰기보다는 소수의 소위 문제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격리하고 치료해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나 직업훈련으로 그 나름의 삶을 찾아주는 방향입니다. 즉 저비용 저인력으로 고효율을 만드는 사회정책이 학교폭력 해결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독일을 집중적으로 돌아보았습니다. 독일은 그러한 사회비용을 감안해서 청소년기부터 소년원에 가야만 할 소위 고위험군의 문제 학생들을 선택적으로 분류해서 전문단체에 충분한 사회비용을 지불하면서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방도 중요하지만 청소년에게도 엄격한 제도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그래도 문제를 일으키면 공권력으로 엄격하게 통제하는 한편 치유 가능한 청소년들을 선별해 공무원이 아닌 민간전문단체가 그들을 집중 치유하도록 적극 지원하는 민관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가피하게 그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해학생도 한때는 피해학생이었다! 그러니 봐주자(?)는 사고방식으로는 영원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단 폭력이 발생하면 결연하게 그 순간에 그것은 불법이라는 원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폭력의 악순환 고리는 영원히 끊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김황식 총리의 학교폭력 종합대책 발표에 폭력 재발 시에는 엄격히 격리하고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은, 선진국 사례에서 보듯이 불가피한 추세 같습니다. 그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학생들에 대한 엄격한 치유프로그램이 전문가들에 의해 강제 적용되어야만 비로소 청소년 범죄 내지 학교폭력 문제가 점차 감소되고 결국 사회비용도 감소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폭력 해법은 학교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주된 장소와 시간이 역시 학교이고, 신고와 처리도 역시 학교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선생님들부터 앞장서서 학교폭력을 근절하겠다고 단호히 선언하고 발 벗고 나설 때, 비로소 이 문제가 정상 궤도로 쉽게 풀려갈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추세를 보면 교권은 추락한 반면 학생들의 인권만 강조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미래가 잘되려면 우선 교사부터 존중받고 교권이 바로 서야 비로소 교육이 힘을 받을 것입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교대로 가야 하고 충분한 인성과 실력을 갖춘 선생님들이 양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솔선수범해야 할 교사들 내에서부터 학교폭력 해법을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교사들 스스로가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결심한다면, 학교폭력은 지금보다 70~80%는 줄어들 것입니다. 즐겁고 신나게 다녀야 할 학교가 50%의 학생이 피해 경험이 있는 고통의 도가니라는 것을 보면 교육정책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교사들에게 보람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정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교사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한다면 경찰이 아무리 나서도 본질적인 해결이 어렵습니다. 가까운 일본도 처음에는 검찰과 경찰이 주체였으나 지금은 문부성이 주체로 학교폭력을 담당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다신 너 같은 아이가 없어야지”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정책책임자의 의지입니다. 이 학교폭력 문제를 망국병으로 인식하고 핵심 부서장부터 이를 중대 사안으로 분류해서 끊임없이 챙기며 또한 전문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야 합니다. 청소년보호법,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청소년 출입제한 업소지정, 청소년지킴이운동, CCTV 설치 등 법률이나 제도적 장치가 많이 있으나 실천이 못 따르고 있어 정부 부처부터 이것을 정확히 지키고 실천하는 의지가 필요하며 언론 등 여론이 항상 감시자의 역할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시민 모두가 발 벗고 나서야만 더 이상 학교폭력의 문제로 인한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내 아이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물이 깨끗해야 물고기도 안전하며 물을 떠나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내 아이 혼자만 안전할 순 없습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배척하는 모습을 어른들이 먼저 보이면 아이들도 자연히 그렇게 교육됩니다. 특히 이번 기회에 공권력은 외부에 있는 폭력조직과 연관되어 있는 일진회 같은 악의 뿌리들을 강력히 소탕해야만 학교 내에서의 범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진정 고통받는 청소년과 그 가정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도움을 주시나요?”하고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바로 학교폭력으로 신음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쉬지 않고 걸려오는 “도와주세요!”하는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상담하는 장소와 사람이 더욱 필요합니다. 최근 상담전화가 4~5배로 폭증해 직원들이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또 죽겠다는 아이에게는 당장 달려가야 합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해시키기 위해 쫓아가야 합니다. 또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관련 자료를 많이 만들어야 하고 또 배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폭력과 피해학생에 대한 실태조사 연구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학교폭력은 소리 없이 개인과 가정을 병들게 합니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절실한 도움을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피해자를 위한 치료 교육과 가해자, 소위 학교부적응 학생을 위한 선도교육도 필요합니다. 피해학생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자아에 대한 정체감을 살려주어 자신의 감정을 올바로 표현하게 하고, 또한 가해학생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어 그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시간이 날 때면 속초에 가서 대현이와 대화를 합니다. ‘대현아, 이제 편히 쉬어라!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는 지금 다른 힘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다시는 너 같은 아이가 없어야지. 힘들기는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게… 네가 하늘에서라도 나를 도와다오!’
  
  대현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벌써 33세입니다. 최근에는 대현이 친구들이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많이 보내옵니다.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해 줍니다. 화사한 결혼식, 축가, 왁자지껄한 결혼식 속에서 나는 늘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하느님이 밉기도 합니다. 무슨 죄가 그리 크다고 부모는 평생 자식들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까요.
  
  주변을 돌아보면 대현이처럼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한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에 너희밖에 없는 것처럼 외롭고 힘들 거야. 그렇지만 조금만 둘러보면 너희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아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 그러니까 혹시 힘든 일을 겪게 돼도 낙심하면 안 돼. 너희가 절망하면 너희를 아껴주던 사람들은 더 크게 상처를 받거든. 그러니까 밝게 살아야 한다. 너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어. 어려운 고비는 누구에게나 있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곧 좋은 세상 행복한 세상이 올 거야.”⊙

한국 감동시킨 일본인 며느리

마음 속 깊이 감동을 느낀 지 가 얼마나 되었는지요? 아니면 남에게 진한 감동을 준 적은 언제였는지요? 감동을 많이 느끼거나 감동을 많이 주는 일이 행복한 일인데 그런 일들을 많이 만드는 하루 만듭시다. 행복하세요. https://youtu.b...